42년 여공 퇴직금 줄다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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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일제때부터 시작한 여공생활 42년, 우리 나라 최장근속「평생여공」이재윤씨(56·광주시 림동 604).
평생 몸담아온 광주 일신방직(대표 김영호·44)에서 지난해 4월 55세로 정년퇴직한 이씨는 그러나 입사일자를 놓고 회사와의 견해차로 1년반이 지난 지금까지 퇴직금수렴을 거부한 채 줄다리기를 거듭하고있다.
회사측은 일신방직이 원래의 전남방직에서 분리된 61년12월을 입사일로 못박고 있다. 그러나 해방전인 45년3월 14세때 일제에 의한 강제노동으로 이 공장여공이 됐던 이씨는 현사장의 부친인 김형남씨(작고)가 회사를 맡고있던 47년3월의 표창장을 근거로 방년부터는 아니더라도 47년 입사를 주장하고 있다. 적어도 83년 광주노동청이 유권해석한대로 53년 2월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3년은 일본인적산기업이었던이 회사를 김형남씨 등 3명이 불하받은 해.
『일제때부터 방직기계를 남편처럼, 공장을 내 몸처럼 아끼며 월급불평없이 개미처럼 일만 해온 나를 이렇게 내쫓을 수 있습니까. 「창업공신」이라고도 주장 할 수 있는 나를 못배운 여자라고 푸대접하는 것 같아 서럽기만 합니다.』
6·25때 기계가 폭격으로 불타 당시 사장마저도 기계를 포기한 상황에서 동료 중 남아있던 15명과 함께 빚을 낸 돈으로 1년여에 걸쳐 방적기 4천8백추를 복구해낸 그였다. 「헛수고」라는 냉소속에서도 신들린 사람처럼 기계를 닦고 죄어 생명을 불어넣었다.
정년퇴직일인 지난해 4월26일 회사측은 61년 입사로 계산한 2천만원의 퇴직금을 내밀었지만 이씨는 받기를 거절했다.
이씨는 그동안 수없이 회사를 찾아가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으나 『법으로 하라』는 무책임한 답변만 거듭했다고 분노를 터뜨린다.
이씨는 재직 중 회사를 상대로 냈던 연차유급휴가청구소송에서는 지난 6월 일부승소확정판결을 받았다. 액수는 많지 않았으나 판결문은 기업의 동일성이 유지된 상태에서 계속 근무한 점을 인정, 회사표창장을 근거로 47년 입사를 인정하고있다고 했다.
회사측은 이에 대해 『초창기부터 근무해온 이씨의 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회사가 61년에 새 법인으로 탄생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명하고있다.
세법상 인정되는 판결 등이 있기 전에는 더 주기 어렵다는 해명이다. 또 이씨가 김형남전사장으로부터 기계복구공로와 관련해 약속받았다는 공로주도 요청해 해결이 안된고 있다고 했다. 80년까지 이씨의 월급은 수당을 합쳐 8만원. 퇴직전에야 25만원을 받았다. 이씨는 「식민지종살이의 설움, 노동자의 설움, 여자의 설움」을 세겹으로 안고 살아온 40여년이었다며 쓸쓸히 웃는다.
30세에 남편을 여의고 4계절 40도를 넘는 작업장에서 기계와 진땀을 홀러온 긴 세월 끝에 홀몸으로 4딸을 훌륭히 키워냈다. <김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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