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에 흩어진 고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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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빨갛게 익은 고추가 길바닥 위에 흩어졌다. 내동댕이쳐진 우유통 속에서 쏟아지는 뽀얀 우유가 아스팔트를 흥건히 적셨다.
경찰의 최루탄 공세에 우왕좌왕 쫓기던 농민들은 보도블록을 뜯어 투석으로 맞섰다. 깨진 병과 돌멩이가 어지럽게 흩어진 거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놈들아! 불쌍한 우리 농민 잡지 말고 전두환·이순자나 잡아라.』 전경을 향한 50대 농민의 절규가 최루탄 폭발음에 묻혔다.
농민들이 쫓겨 달아난 자리엔 「뼈빠지게 지은 농사 제값 받고 팔아보자」라고 쓰인 피킷이 나뒹굴었다.
17일 오후 서울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농축산물수입저지 및 농산물 제값 받기 전국농민대회」에 참석한 뒤 평화 행진을 벌였던 1만여 농민과 경찰이 충돌한 신문로 구서울고앞 도로.
농민들은 이날 대회를 마친 후 『통상법 301조를 내세워 한국농민을 압살하는 미대사관으로 가자』며 시위에 나섰다.
경찰은 「평화시위」를 조건으로 강제진압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 편도 4차선 도로를 차단하고 백차를 동원, 호위까지 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미대사관과 인접한 신문로에 이르자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경찰과 「계속하겠다」는 시위대 사이에 「약속」은 깨지고 최루탄과 투석 공방전이 재연됐다.
뒤따르는 극심한 교통체증. 거의 같은 시간, 서울시 철거민 4백여명도 「세입자 대책 없는 재개발 반대」구호를 외치며 시청앞 광장을 점거, 5시간동안 연좌농성을 벌였다.
학생·농민·철거민…제각기 다른 주장과 이익을 앞세우고 대정부 성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서울. 소용돌이치는 「민의」의 폭발은 언제쯤 하나의 흐름을 이룰까. <이기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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