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은 엊그제 국회 청문회 증언에서 이런 말을 했다. 84년 일해재단 성금액수를 나눈 뒤 청와대 만찬에 초대받았을 때의 얘기다.
『…전 전 대통령은 술이 많이 됐는데(취했다는 뜻일 듯), 술이 좀 된 기분으로 「내가 기업을 키워주려면 키울 수 있고 죽이려면 죽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지금 와서 보니 그 말이 나를 두고 한 말이었다.…』
술을 좀 할 줄 아는 사람이면 취중에 한 말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게 술꾼들의 미덕처럼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허물없는 주석이라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양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절대권력을 쥔 한 나라의 대통령이 기업인들을 만찬에 불러놓고 할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설사 그런 말을 했다 하더라도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크게 문제 삼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 신문을 보면 적어도 「그 말」가운데 「기업을 키워주려면 키워줄 수 있다」는 부분은 사실과 부합되는 것 같다.
우선 「이창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젊고 유능한」기업인의 예를 보자. 그는 어느 전자공대를 나와 75년 동양철관의 동력기사로 들어가 79년까지 평사원으로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5공화국이 들어서자 그의 「유능함」이 갑자기 부각되어 초고속 승진을 거듭, 83년에는 부사장 자리까지 오른다.
그는 이어 (주)동일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동양철관 입사 당시 불과 몇 천 만원의 재산밖에 없었던 그가 자본금이 20억원이나 되는 회사의 사장이 된 것이다. 그리고 첫해 매출액은 2백41억원, 2년 뒤인 85년에는 5백17억원으로 급 신장한다.
그래서 운수회사, 컴퓨터 용역업체 등 서너 개의 계열회사를 차려 「회장님」이 된다. 그야말로 우리 나라 기업 사에 남을 입지전적 기업인임에 틀림없다.
그가 누구인가. 바로 「기업을 키워줄 수 있다」는 당시 대통령의 처남이다.
반대로 또 한 사람의 「무능한」기업인을 보자. 그는 83년만 해도 매출액으로 국내 랭킹 7위에 머물렀던 한 재벌그룹의 총수였다.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그는 5 공화국시절 23개 계열회사와 함께 침몰하는 비운을 겪는다. 바로 그 같은 증언을 한 양정모씨다. 공교롭다면 너무나 공교로운 일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