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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잠 빠진 한국문학에 봄바람 공지영을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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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며칠 전 서울의 한 지하철역. 작가 공지영은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들여다 보니 가판대의 잡지 표지였다. 잡지 상단엔 '이 시대 리더들의 이야기'라고, 사진 아래엔 '소설 시장 살리는 작가 공지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386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도 아니고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도 아니었다. '시대의 리더' 공지영이었다.

올 봄 한국문학에 '공지영 바람'이 불고 있다. 깊은 겨울잠에 빠진 한국문학을 깨우는 봄바람이다. 지난해 4월 펴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1년 넘게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서 꼼짝 않고 있다. 지난달 30만 부를 돌파했다. 지난 연말 일본작가 쓰지 히토나리와 함께 펴낸 '사랑 후에 오는 것들'도 20만 부를 훌쩍 넘겼다. 한국작가 한 명이 쓴 소설 두 권이 베스트셀러 순위를 6개월째 동반 점령한 건, 요즘 같은 형편에서 하나의 사건이다.

[사진=최승식 기자]

# 공지영이 말하는 '공지영 바람'

그러나 정작 자신은 말을 아낀다. 공지영 소설이 유독 인기인 이유에 대해 그는 에둘러 답할 뿐이다. 가령 "열렬한 에너지로 쓴다는 소릴 들었다"거나 "작가의 상처가 시대의 상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정도다.

애써 몸을 낮추는 이유가 있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잘 읽히는 작가는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문단 일부의 시각 때문이다. 실제로 그에 대한 비평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여성운동을 핫도그처럼 판다는 악평마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발표할 때 후일담 문학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도 그러한 기미는 감지됐던 터였다. 두 소설 모두 청춘남녀의 건강한 사랑 이야기다. 공지영 바람은 바로 여기서 불어온다. 작가는 "한국 젊은이가 요즘 일본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는 사랑 이야기를 갈구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들의 감성을 헤아리는 한국문학이 여태 드물었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문장이 거칠다는 지적도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문장 하나하나에 매달리기보다는 이야기의 전체 덩어리가 더 중요하다"며 "나는 글을 쓸 때 폭풍처럼 쓴다. 원고지 100매 정도 단편은 하루 만에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서사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문장 한 줄에 매달리다 이야기 흐름이 끊기는 게 싫다는 얘기다. 이럴 경우 문법적으로 엄격하지 못한 문장이 나올 수 있다. 대신 탄력이 붙는다. 골치 아픈 독서를 꺼리는 인터넷 세대의 독서습관을 고려한다면 공지영 문장은 외려 장점이 될 수 있다.

공지영의 성공은 자극적인 소재에서 비롯됐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의 소설은 주로 논쟁적인 이슈를 다뤄왔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호기심을 자극할 법한 모든 이야기가 실제로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취재에 열심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준비할 때는 1년 6개월간 사형수를 만나고 다녔고,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기획할 때는 일본작가와 1200통이 넘는 e-메일을 주고받았다. 둘은 혈액형.키.몸무게.가계도까지 교환했다.

# 나는 혼자였다, 빗방울처럼

최근 여세를 몰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공지영은 8일 신작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황금나침반)를 발표했다. 다시 화제가 될 만하다. 10년 만에 발표한 에세이인데다, 작정하고 펴낸 문학에세이기 때문이다. 공지영의 꿈은 원래 시인이었다. 그래서 문장은 촉촉하고 달곰하다.

그러나 산문집은 다른 이유로 화제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작가 자신의 상처를 처음으로 드러낸 저작이기 때문이다. 산문집은 시 한 수 인용하고, 감상을 이어붙이는 문학에세이 형식이다. 그러나 차분히 읽어보면 행과 행 사이에서 개인 공지영의 상처가 만져진다. 그러니까 산문집은 시를 읽고 느낀 감상을 적은 게 아니라, 작가가 상처를 입었을 때 위무해주었던 시 한 수 한 수를 불러모은 것이다. D H 로렌스의 '겨울이야기' 뒤에 이어진 작가의 말이다.

'나를 버리고 … 가버렸던 그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는다는데 어쩌면 그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가 나를 모욕하고 그가 나를 버리고 가버렸던 날들만 떠오르다니. 제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리고 그의 죽음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저의 진실이었습니다.'

지난해 두 번째 남편이 암으로 숨졌을 때 얘기다. 그때 심정을 처음으로 공개한 문장이다. 자칫 잘못하면 작가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속내를, 그는 왜 굳이 드러냈을까.

"이제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한 일, 성씨가 다른 세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나는 이 땅에 행복해지려고 태어났지 이혼하려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내 인생이 결혼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깨달았습니다."

내년이면 공지영은 작가인생 20년이 된다. 그러고 보니, 공지영은 얼추 십 년 단위로 문학적 전환점을 맞았다. 88년 등단했고 97년 대표적인 페미니즘 소설 '착한 여자'를 발표했다. 그리고 오늘. 작가 공지영은 더 이상 '페미니즘'이나'후일담' 등으로 형용이 불가능한 작가가 돼버렸다. '소설 시장을 살리는 시대의 리더'가 돼버렸다. 무엇보다 공지영은 삶의 상처도 문학으로 발언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져 있었다. 올 연말쯤 공지영은 성씨 다른 네 식구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을 발표할 계획이다. 엄마는 공씨고 첫 딸은 위씨고 첫 아들은 오씨고 막내 아들은 이씨인, 그러나 아빠는 없는, 행복한 한 가족을 말할 것이다.

■ 공지영은

▶1963년 서울 출생 ▶85년 연세대 영문학과 졸업 ▶85년 무크 '문학의 시대'에 시 '이태원의 하늘' 발표 ▶87년 공장에 위장취업했다가 한 달 만에 발각돼 강제 퇴사, 서울 구로구청 점거사건으로 열흘간 구류 ▶88년 '창작과비평'에 중편 '동트는 새벽'으로 등단 ▶주요 작품:'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93) '고등어'(94) '착한 여자'(97) '봉순이 언니'(98)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5) '사랑 후에 오는 것들'(2005) 등

글=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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