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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공소 골목길의 ‘문화살롱’…3년 이상 종업원은 회사 주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상원의 소소리더십(26)

“그대와~ 라라라라 랄라 라라라~

이번에 내릴 곳은 문래역 7번 출구
조금은 낯선 골목들을 지나고
줄지어 있는 철공소에 놀라지 말고

이름 모를 골목길 속을 사랑스런 그대와 함께해
기분 좋은 바람도 함께 불어 오는 밤
왠지 그래와 함께 걷고 있으면
낡은 기계소리도 멜로디가 되어
차가운 철꽃도 따뜻한 향기를 내고
이 밤 그대와 함께 발걸음을 맞춰 노래해”

그룹 ‘자전거 탄 풍경’의 김형섭이 부른 노래 ‘문래동’의 가사다. 인터뷰 약속장소로 들어가는 문래동 골목길은 노래 가사처럼 철공소가 많아 조금 낯설었다. 사실은 철공소가 많아 낯선 것이 아니라 철공소 사이사이에 예술가의 작업실과 멋진 분위기의 카페, 식당, 술집이 자리 잡고 있는 풍경이 조금 생경하게 느껴진 것이다. 어릴 적 친척 집을 방문하러 가끔 오던 기억 속의 문래동이 아니었다.

문래동의 명소 ‘문래문화살롱’에서 공연하는 인디뮤지션들 사진 앞에 선 손병문 대표. [중앙포토]

문래동의 명소 ‘문래문화살롱’에서 공연하는 인디뮤지션들 사진 앞에 선 손병문 대표. [중앙포토]

2010년 문래예술공장, 2013년 문래소공인특화지원센터가 문을 열면서 이전의 어둡고 지저분했던 철공소 골목 이미지를 벗기 시작했다. 이렇게 변모한 문래동의 명소 중에서도 복합문화공간 ‘문래문화살롱’은 독특한 분위기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플라이스페이스의 손병문(45) 대표에게 우선 ‘살롱’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부터 물어봤다.

하우스맥주집 5년만에 쫄딱 망해 

“살롱이 방이란 뜻의 프랑스어잖아요. 18~19세기 프랑스 예술가와 지성인들이 모이는 사교장소였고요. 예술가와 팬들이 모여 교류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지었지요. 앞에는 지역명을 넣어 문래문화살롱이라 했어요. 양평동에 ‘양평문화살롱’도 운영하고 있고 이달 말에는 연희동에 ‘연희문화살롱’도 문을 열 계획입니다.”

철공소 골목 사이에 자리 잡은 복합문화공간 ‘문래문화살롱’. [사진 이상원]

철공소 골목 사이에 자리 잡은 복합문화공간 ‘문래문화살롱’. [사진 이상원]

원래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을 했는지.
“아니에요. 순전히 우연이었죠. 문화살롱 열기 전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하우스맥주집을 운영했는데, 맥주와 함께 외국 가수들의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죠. 처음이라 경험도 없는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9년 신종플루가 유행하면서 손님이 뚝 끊겼어요. 5년 만에 문을 닫았죠. 말 그대로 쫄딱 망했습니다.”
망하고 나서 어느 정도 힘든 상황이었나.
“사실 제가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고요. 그 전에도 사업을 하다가 망해 대리운전이나 우유배달을 하며 다시 일어선 적도 있어요. 처음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괜찮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하루는 택배 상·하차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오후 4시부터 대기해 새벽 6시까지 일을 하면 5만원 정도를 벌었는데,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문화살롱을 시작할 수 있었나.
“망한 사업도 우연히 시작한 일이고, 재기한 것도 역시 우연이었죠. 제가 고등학교 때 밴드부에서 트럼본을 불었고 음악을 좋아했어요. 지인들 중에 음악 하는 분도 많고요.

어느 날 저녁 문래동 철공소 골목을 지나는데 ‘저기 골목에서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오면 멋지겠다’ 생각이 들더군요. 일산 맥줏집이 망해 그렇지 분위기는 좋았거든요. 그때 이미 문래동은 문래창작촌과 예술적 분위기의 가게가 철공소와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동네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어요. 독특한 골목 분위기와 예전 경험이 섞여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 같아요.”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아도 돈이 없었을 텐데.
“장소를 알아보니 딱 마음에 드는 곳이 있었죠.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 그리고 권리금 2000만원이었어요. 내 사정을 잘 아는 지인들이 도움을 줬어요. 그때 고마움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인생이 리셋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정말 다시 태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안주보다는 음악으로 손님 만족시켜

라이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맥줏집은 많은데 문화살롱만의 특별한 점이 있나.
“인디뮤지션이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공연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지금도 노력 중입니다. 가수가 매일 공연을 하는데 살롱 운영 또한 뮤지션이 직접 합니다. 그전에 어울리면서 보니까 생활비 버느라고 연습이나 공연에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는 뮤지션이 많더라고요. 편의점에서 10시간 아르바이트해 7만원 정도 버니까요.

문화살롱에서는 모두 직원으로 채용합니다. 하루 4~5시간 근무에 평균 5만원 정도 지급하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3년 이상 일하면 회사 지분도 나눠 줍니다. 일단 생활이 안정돼야 예술도 할 수 있잖아요. 제가 사업 망하고 바닥까지 떨어져 힘든 생활을 해 보니 알겠더군요.

그 덕분인지 뮤지션의 실력과 분위기가 정말 좋아요. 공연할 때 최소한 한 곡은 자기 노래로 해야 하는 걸로 계약돼 있습니다. 싱어송라이터를 키우는 거죠. 지금까지 앨범을 20장 가까이 제작했습니다. 얼마 전 양평문화살롱 점장으로 있는 한 실력파 인디밴드의 데뷔앨범도 나왔는데 반응이 좋습니다.”

밖에서 들여다본 ‘문래문화살롱’과 가수 황명하 씨 공연 모습. [사진 이상원]

밖에서 들여다본 ‘문래문화살롱’과 가수 황명하 씨 공연 모습. [사진 이상원]

양평문화살롱이나 연희문화살롱도 같은 컨셉인가.
“문래문화살롱은 술을 팔고요, 양평문화살롱은 커피를 팝니다. 그리고 지하에 갤러리 ‘아트필드’를 함께 운영하면서 각종 전시회와 공연도 엽니다. 인테리어와 음식보다는 뮤지션과 콘텐츠에 집중합니다.

살롱 앞에 아예 ‘저희 안주에 만족 못 하시는 것 압니다. 대신 음악으로 만족시켜 드릴게요’라고 붙여놨어요. 다행히 팬들이 좋아해 주세요. 연희문화살롱은 지금까지 문화살롱 경험과 노하우를 모두 녹여 좀 더 특별한 공간으로 운영할 계획입니다. 나와 스태프들 모두 큰 기대를 갖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카페, 공연, 전시가 함께 하는 ‘양평문화살롱’(사진 위)과 ‘아트필드’(사진 아래). [사진 이상원]

카페, 공연, 전시가 함께 하는 ‘양평문화살롱’(사진 위)과 ‘아트필드’(사진 아래). [사진 이상원]

재기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이 있나.
“예전에 히트곡 ‘난 바람 넌 눈물’을 작사·작곡하고 노래까지 불러 큰 인기를 끈 가수 신현대 형께 정말 감사드려요.지금도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장을 맡아 콘서트를 계속하고 있고 특히 저랑 산에 자주 가는데, 작년에는 같이 히말라야에 올라 콘서트를 열어 지진피해 성금도 기부했죠. 어려울 때 같이 산에 오르면서 해 주신 조언 아닌 조언이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모든 문제가 생겼을 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라. 그러면 이해 못 할 게 없다’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나중에 같이 산속에 공연장이 있는 캠핑장을 운영하는 게 꿈입니다. 그리고 현재 함께 하는 우리 뮤지션들을 빼놓을 수 없죠. 저를 믿고 따라와 주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니까요.”

손 대표와 인터뷰 내내 인디 가수들의 안정적인 활동과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그의 포장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진심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문화살롱 근처에 있는 공간을 빌려 ‘인형뽑기방’을 연 뒤 가수 한 명 당 기계 한 대씩을 배정해 직접 관리하고 수익을 가져갈 수 있게 해 줬다.

인형뽑기 인기가 시들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바로 ‘유쾌한 살롱’으로 이름을 바꿔 가수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줬다. 그가 사업에 실패한 뒤 어려움을 겪은 경험과 깨달음 덕분인지 폼 잡지 않고 현실적인 방안을 만들어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걸어 나오면서 ‘문래문화살롱’이 가진 또 하나의 숨은 매력을 발견했다.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골목길의 따스한 정취다. 퇴근길 해질녘 골목길에서 부담 없이 맥주 한 잔, 노래 한 곡의 즐거움을 주는 문화살롱이 더 많은 지역에 문을 열기를 기대해 본다.

이상원 밤비노컴퍼니 대표·『몸이 전부다』 저자 jycys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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