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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건강가정기본법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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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여정부가 출범한 이래 여성의 지위향상과 관련해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성매매방지법 제정이나 호주제 폐지, 혹은 보육예산의 획기적인 증대 등이 그 좋은 예다. 그러나 여성운동이나 여성학계에서 납득할 수 없는 정책은 2004년 2월 9일 건강가정기본법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2005년 1월 이래 전국에 55개의 건강가정지원센터를 졸속으로 설치.운영하는 것이다.

이 법안은 보건복지부에 의해 준비됐으나 여성계와의 충분한 사전논의와 준비 없이 통과돼 법 제정 과정에서 민주정부가 거쳐야 할 절차민주주의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이 법의 명칭이다. 건강가정기본법이라는 명칭은 '저개발국가의 국민계몽 프로젝트'같은 이미지를 준다. 지금의 한국 사회 발전 수준에는 부합하지 않는 명칭이다. 또한 '건강'이라는 수식어에는 일정한 가치관이 내재돼 있다. 사실상 이는 불건강한 가족을 상정하고 있어 '정상가족/비정상가족'이라는 이분법을 만들어 낸다.

최근에 활발해진 한부모가족운동을 통해 우리는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가구주 가족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빈곤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큰 어려움은 사별했거나 이혼한 여성가구주 가족들을 향한 사회적 차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차별의 배경에는 항상 '정상가족/비정상가족'의 이분법이 내재돼 있다.

건강가정기본법은 최근에 문제되고 있는 가족 위기의 대처방안으로 전통적인 가족의 기능 강화를 모색하고 있고, 그 임무를 건강가정사에게 부여하고 있다. 즉 이는 가족의 위기에 대한 가족구성원의 도덕적 책임을 강화하거나, 위기 가족에 대한 복지서비스 지원을 지엽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우려를 안고 있다.

건강가정기본법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면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현재 국회에는 4개의 법안, 가족지원기본법안.가족정책기본법안.평등가족기본법안.건강가족기본법안 일부 개정법률안이 계류 중이다. 우리 사회의 복지서비스는 과거처럼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에서 한걸음 나아가 국민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가족 문제가 국민 모두의 일상적 삶을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인 만큼 차제에 새로이 개정될 가족 관련 법안에서는 국민에게 전범(典範)이 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가족의 관점과 정책이 담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론(公論)의 장에서 우리 가족정책을 둘러싼 토론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가족해체 배경에는 전통가족의 붕괴나 도덕적 기강의 해이보다는 신용불량자 양산,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의 몰락, 정리해고 등의 사회적 요인들이 더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기에 새 법에서는 무엇보다 가족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이 정교하게 제시돼야 한다. 다음으로 새 법안이 지향하는 정신 속에는 가족이기주의 외에는 사회적 공동체성이 결여돼 버린 한국 사회에서 대안적인, 평등한 가족문화를 형성하는 것을 통해 사회적 유대와 인간성을 복원하려는 목표설정이 포함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복지체계와 관련해선 건강가정지원센터는 기왕에 존재하는 종합복지관.여성발전센터.여성단체의 상담소와 중첩돼 예산 낭비를 초래하고, 통합적인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한 네트워크가 없는 상황에서 유사기구와의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또한 이 센터 안에 성 평등한 가치를 지니고 상담의 전문성을 지닌 인력이 제대로 배치돼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복지체계의 거시적 틀 안에서 어떻게 보다 통합적이면서 효과적인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고려가 병행돼야 한다.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