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외친 정부, 최악 폭염 덮치자…"일단 원전 돌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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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운영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이 현재 정비 중인 원자력발전소의 재가동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 연이은 폭염에 전력 수요가 많이 늘어난 데 따른 대응이다. 탈원전을 내세운 정부가 결국은 원전으로 전력 수급 조절에 나선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연일 폭염이 이어진 22일 경복궁을 찾은 관람객들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장진영 기자

연일 폭염이 이어진 22일 경복궁을 찾은 관람객들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장진영 기자

한수원은 22일 “현재 정지 중인 한빛 3호기와 한울 2호기를 전력 피크 기간(8월 2∼3주차) 이전에 재가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한빛 1호기와 한울 1호기의 계획 예방정비 착수 시기를 전력 피크 기간 이후로 조정하기로 했다. 최근 계획 예방정비를 마친 한울 4호기는 지난 21일부터 다시 가동을 시작했다. 오는 24일 100% 출력을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정재훈 한수원 사장은 “이를 통해 전력 피크 기간 내 총 5개 원전, 500만㎾의 추가 전력 공급이 가능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예정에 없던 긴급 현장 점검에 나섰다. 백 장관은 22일 김종갑 한국전력 사장 등과 함께 서울 광진구에 있는 한전 뚝도 변전소와 인근 아파트를 방문했다. 백 장관은 “발전기 공급이 확충되고 있고 비상자원도 갖추고 있는 만큼 안정적 전력수급이 가능할 것”이라면서도 “연이은 폭염에 정전 등으로 불편을 겪는 일이 없도록 관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당초 정부는 올여름 전력수급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8808만㎾로 역대 여름철 전력 수요량 기록을 경신한 20일에도 “공급예비율이 11% 이상으로 수급은 안정적인 수준”이라고 밝혔다. 통상 업계에선 공급예비율이 10% 이상이면 전력 수급에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전력 수요는 역대 최대였던 2016년 수준을 넘어서 지난주에만 역대 최고 기록을 네 번이나 경신했다. 폭염이 당분간 지속할 것이란 예보가 나오면서 급히 대응책 마련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산업부 관계자는 “휴가 직전 수요가 몰리는 이번 주가 최대 고비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연일 이어진 폭염으로 전력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7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전력 남서울지역본부 계통운영센터에서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연일 이어진 폭염으로 전력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7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전력 남서울지역본부 계통운영센터에서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원전 정비계획까지 조정하고 나서자 일각에선 공급을 늘리려 원전 가동을 인위적으로 늘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한수원이 예방정비 기간을 억지로 앞당기거나 뒤바꾼 정황은 없다. 5월 11일 계획 예방정비를 시작한 한빛 3호기는 당초 8월 9일 정비를 끝낼 계획이었다. 한울 2호기 역시 지난 5월 10일 정비를 마쳤다. 그러나 지난 12일 갑자기 정지해 복구 작업을 진행했고, 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아 빨리 재가동에 들어간 경우다.

산업부 관계자는 “탈원전 등 에너지 전환 정책은 친환경 전원믹스로의 전환을 위한 장기 계획”이라며 “운영 중인 원전의 가동 중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원전이 수급에 기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탈원전을 선언하고서 결국 어려울 땐 원전에 기댄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부는 지난 5일 발표한 ‘여름철 하계수급대책’에서 올여름 최대 전력수요를 8830만㎾로, 그 시기는 8월 둘째, 셋째 주로 예상했다. 그런데 이미 전망이 빗나갔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폭염에 따른 수급 문제는 앞으로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탈원전을 주장하지만 결국 원전이 꼭 필요하다는 걸 자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현재 수요감축요청(DR)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DR은 기업이 피크 시간에 전기 사용을 줄이면 정부가 보상해주는 제도다. 현재 DR에 참여 중인 기업이 감축 요청에 응하면 최대 400만㎾의 수요를 감축할 수 있다. 산업부는 지난해 여름에도 두 차례 DR을 발령한 적이 있다. DR은 예비력이 1000만㎾ 이하로 떨어지고, 수요가 8830만㎾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하는 경우에 발령한다. 지난 20일 공급예비력은 942만㎾, 수요는 8808만㎾였다. 이번 주에 수요가 조금만 더 늘면 발령 기준은 충족하는 셈이다.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21일 정비 작업이 한창인 한울 2호기 현장을 찾아 설비를 점검하고 있다.[사진=한수원]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21일 정비 작업이 한창인 한울 2호기 현장을 찾아 설비를 점검하고 있다.[사진=한수원]

그러나 산업부의 고민은 깊다. 정부의 탈원전 선언 이후 DR은 탈원전에 따른 전력 부족을 기업에 전가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사실 DR를 발령한다고 해도 실제 수요 감축 규모는 50만㎾ 정도다. 공급예비율로 따지면 1%에도 못 미친다. 실익이 크지 않은데 자칫 기업을 옥죈다는 비판만 받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제대로 된 공론화 없이 원전을 없애겠다고 선언했으니 각종 부작용이 쏟아지는 것”이라며 “재생에너지 확대란 방향엔 공감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에너지원을 대안으로 할 것인지 지금이라도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종=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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