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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전 뼈 102개가 말했다 “익산 쌍릉 주인은 백제 무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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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익산 쌍릉 대왕릉에서 발견된 석 점 뼈는 무덤 주인을 추정하는 중요 단서가 됐다. 무왕(武王)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백제 톺아보기의 한 실마리다. [뉴시스]

익산 쌍릉 대왕릉에서 발견된 석 점 뼈는 무덤 주인을 추정하는 중요 단서가 됐다. 무왕(武王)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백제 톺아보기의 한 실마리다. [뉴시스]

102조각 뼈가 말한다. ‘이 무덤 주인은 백제 무왕’이라고. 1400여 년 전 죽은 한 남자의 유골함이 벽화나 유물 한 점 없는 텅 빈 무덤에 남아 자신을 스스로 존재 증명하고 있다.

일제 발굴 유골 100년 만에 첨단분석 #연골 골화 … 50 ~ 70대 고령 흔적 #콜라겐 많아 고열량식 고위층 추정 #선화공주 스캔들 ‘서동요’ 주인공

18일 오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대강당. 복장뼈, 엉덩관절, 정강이뼈 석 점이 목제함과 함께 공개됐다. 금방 바스라질 듯 누르튀튀한 유골은 긴 세월을 이겨내고 백제의 부강을 위해 노력했던 임금의 자취를 증거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는 이날 지난 4월 전북 익산 쌍릉(雙陵·사적 제87호) 대왕릉에서 발견된 인골을 국내외 전문 기관과 협력해 첨단 과학·공학 기법으로 조사한 결과 그 주인공이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일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했다.

무왕(?~641)은 600년에서 641년 재위하며 백제가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국방을 튼튼히 하며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 마를 캐 생계를 유지한 데서 서동(薯童)이라 불렸는데,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려 꾀를 쓴 서동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지며 사랑꾼의 대표 인물로 꼽힌다. 현존 석탑 중 가장 오래되고 큰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을 창건한 이도 무왕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남아 있던 뼈는 잘게 바서지고 오염됐으나 중복된 부위가 없어 한 사람의 것으로 추정됐다. 이 중 비교적 식별이 잘 되는 뼈 19조각을 법인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한 인간의 모습이 윤곽을 드러냈다. 팔꿈치 뼈의 각도, 목말뼈(발목뼈 중 하나)의 크기 등이 남성이다. 넙다리뼈(골반과 무릎 사이에 뻗어 있는 인체에서 가장 길고 큰 뼈)의 최대 길이를 추정해 산출해 보니 키는 1m61~1m70.1㎝로 조선 시대 성인 남성의 평균 키를 잣대 삼으면 비교적 장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는 무왕이 “풍채가 뛰어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이와도 맞아떨어진다. 목의 울대뼈가 있는 갑상연골에 골화(骨化)가 진행된 정도와 골절 등 퇴행성 질환 흔적을 보아 50~70대 고령층으로 낙상 병력이 있다.

이우영 가톨릭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는 “정강뼈에서 추출한 콜라겐을 분석해 보니 노년에도 곡물을 많이 먹고 어패류 등의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한 고칼로리식을 한 것으로 나타나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미국 베타연구소는 가속 질량분석기를 이용한 정강뼈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인골의 주인이 620~659년에 사망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런 인골 자료 분석에서 나온 신체 특징과 병리학적 소견을 대입해 보니 백제 시대 말기에 이만한 규모와 품격의 왕릉급 무덤에 묻혔을 비슷한 모습을 한 인물은 무왕이 유일하다.

이성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백제 최후의 왕인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 생을 마쳤으므로 이 대왕릉이 백제의 마지막 무덤 형식이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실장은 “대왕릉에서 180m 떨어진 소왕릉을 내년에 본격 발굴하면 무덤 주인공이 무왕임을 확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소왕릉이 선화공주의 무덤이길 바라며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되살리고 싶어 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갈등 관계 등을 미루어보면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다.

1917년 조선총독부가 ‘조선고적조사’ 사업의 하나로 쌍릉을 단 며칠 열어보고 “백제의 왕릉 또는 그에 상당한 자의 능묘가 분명하다”는 짤막한 보고서만 쓴 채 닫아버렸을 때 그들은 유골에 손을 대는 것이 꺼림칙해 대충 만든 나무상자에 뼛조각을 쓸어 담아 밀쳐두었다. 100년 뒤 쌍릉 주인공의 비밀을 파헤치는 길에 그의 인골이 횃불이 됐다. 뼈에 사무친 무왕의 기상이 상자를 보호했을까. 무덤 주인을 가려내는 일에도 힘이 붙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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