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보며 "막가는 인생"자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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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9일 새벽 서울 안암동 3가 132의 13 주택가 손병록씨(55·약국경영)집에 침입한 7인의 탈수범은 권총·과도를 들이대고 가족들을 위협, 일가족을 26시간 동안 공포에 떨게 했다.
지강헌·강영일 등 탈주범 7명은 9일 오전 2시 20분쯤 손씨 집 담을 넘은 뒤 열린 현관문으로 들어가 안방 등 3곳에서 잠자던 손씨 등 가족 6명을 권총과 흉기로 위협, 양손을 넥타이로 묶은 뒤 안방으로 몰아넣고 이불을 뒤집어 씌웠다.
손씨 집엔 손씨 부부와 1남 1녀·조카·종업원 등 6명이 있었다.
범인들은 수갑·쇠꼬챙이 등도 들고 있었으며 주인 손씨에게 『우리가 탈주범들이다』 『돈을 내 놓으라』고 위협, 주인 손씨가 『돈이 없다』고 하자 집안을 뒤졌다.
범인들은 돈이 나오지 않자 『잘 못 들어 왔다』며 『우리는 시민들을 괴롭히기 위해 탈주한 것이 아니고 형량이 무거워 탈주했다』며 손씨 가족들과 함께 TV를 지켜보는 등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범인 중 지강헌은 가족들에게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들이대며 『우리는 막가는 인생이다.서툰 짓하면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가족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도 못 질러 이웃들도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다. 탈주범들은 오전 7시쯤 TV뉴스를 통해 한남동 술집에서 탈주범 동료 3명이 술집주인의 신고로 검거됐다는 뉴스를 보며 『저 주인 얼굴을 잘 기억해 두어라. 보복한다』고 해 가족들은 제대로 얼굴을 들어 범인들을 바라다보지도 못했다.
낮 12시쯤 점심시간이 되자 탈주범들은 손씨 부인 이정자씨(47)의 손발만 풀어준 뒤 점심으로 죽을 끓이게 해 식사를 했으며 오후 2시쯤에는 거실을 뒤져 마주앙 2병·캡틴 큐 1병을 나누어 마신 뒤 술이 부족하자 장독대 등을 뒤져 담가둔 포도주를 퍼다 마셨다.
오후 6시쯤 저녁식사를 한 뒤 강영일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근처 구멍가게에 나가 담배 10갑, 우유 2통, 오징어·감 등을 사와 주인 손씨와 담배를 나눠 피우며 가족들에게 감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범인들이 당초 나가기로 약속했던 오후 8시가 넘자 취기가 오른 범인들은 『며칠 더 묵고 가야겠다』며 자신들끼리 의견 충돌로 심하게 말다툼을 하기 시작, 가족들을 더욱공포에 떨게 했다.
범인중 손동완은 주인 손씨가 약국을 경영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살 약을 구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으며 두목 역할을 한 강영일은 일단 지강헌이 갖고 있던 권총을 다른 동료에게 넘겨 주려다 지와 몸싸움까지 벌였다.
이때 딸 은숙 양이 『내일 학교에서 시험을 보기 때문에 꼭 등교해야 한다』고 애원하고 집주인 손씨가『젊은 사람들이 늦기 전에 잘 생각하라』고 설득, 범인 강과 손으로부터 『사람은 안 해치고 내일 새벽에 나간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가족들은 오전 6시 5분 강 등 4명이 1차로 『지옥에 가서 보자』며 집을 빠져나가고 6시10분쯤 손등 3명이 나가자 오전 7시 20분쯤 결박을 풀고 경찰에 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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