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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리니코프는 정의로웠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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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호 14면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27> 상트페테르부르크: 죄와 벌, 그리고 정의 

소설 『죄와 벌』에서 노파를 살해한 라스콜리니코프가 현장에서 노파의 여동생과 마주치는 장면. 19세기 화가 카라진이 1893년 그린 일러스트다.

소설 『죄와 벌』에서 노파를 살해한 라스콜리니코프가 현장에서 노파의 여동생과 마주치는 장면. 19세기 화가 카라진이 1893년 그린 일러스트다.

 우선 『죄와 벌』의 내용을 살펴보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잘생기고 똑똑한 청년이다. 법대에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 얼마 전에 휴학했다. 시골에서 여동생과 함께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어머니가 부쳐주는 쥐꼬리만한 용돈으로 간신히 끼니를 해결한다. 방세는 몇 달이나 밀려 있다.

2007년 방영된 8부작 TV시리즈 ‘죄와 벌’의 포스터

2007년 방영된 8부작 TV시리즈 ‘죄와 벌’의 포스터

그가 거주하는 슬럼 지역에는 조그마한 전당포가 있는데, 인색하기로 악명 높은 노파가 주인이다. 노파는 빈곤에 찌든 서민들이 가져오는 자질구레한 물건에 푼돈을 쥐여주며 과도한 이자를 매긴다. 원금 상환이 하루만 늦어도 저당물은 처분해버린다. 평생 이런 식으로 빈민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어찌나 인색한지 하인 쓰는 돈이 아까워서 지적 장애인인 여동생을 노예처럼 부려먹는다.

젊고 착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데 이렇게 늙고 사악한 인간이 그 많은 돈을 움켜쥐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아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어떨까? “어쩌면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도 있고 수십 가구가 극빈과 분열, 파멸, 타락, 성병 치료원에서 구원받을 수도 있어. 이 모든 일이 노파의 돈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단 말이야.” 딱 한 사람, 그것도 사악하기 그지없는 인간을 제거하고 수백, 수천 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살인은 인류를 위해 눈감아 주어도 되지 않을까.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사고 실험이다.

1969년 제작된 레프 쿨리자노프 감독의 영화 ‘죄와 벌’ 포스터. 소설을 가감 없이 영상화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1969년 제작된 레프 쿨리자노프 감독의 영화 ‘죄와 벌’ 포스터. 소설을 가감 없이 영상화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공중에 떠도는 이상하고 불온한 생각”은 라스콜리니코프의 머릿속에서 뛰쳐나와 살인의 실행으로 돌진한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여동생 두냐가 겪은 수난 때문이다.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 의하면 두냐는 부잣집 가정교사로 들어갔는데 변태성욕자인 주인 남자가 스토커 수준으로 추근거리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간신히 최악의 상황을 모면한 두냐는 중년 변호사 루진과 약혼한다. 야비하고 인색한 인간이라는 걸 알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는 늙은 어머니와 학업을 중단한 오빠를 위해서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책에서 읽은 이론, 무더운 날씨, 영양 부족 여기에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더해지면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폭발한다. 두냐의 변태 고용주와 야비한 약혼자에 대한 증오가 전당포 노파에게 투사된다. 그는 하숙집 부엌에서 장작 패는 도끼를 훔쳐 품에 넣고 전당포에 간다. 물건을 잡히러 온 척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끼를 마구 휘둘러 노파를 살해한다. 하필이면 이때 노파의 여동생이 들어와 유혈이 낭자한 살인 현장을 목격한다. 지적 장애인이지만 목격자는 어디까지나 목격자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비명을 지를 생각조차 못하고 멍하니 서서 바라보는 백치 여인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친다.  

영화 ‘죄와 벌’(1969)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역할을 맡은 배우 게오르기 타라토르킨

영화 ‘죄와 벌’(1969)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역할을 맡은 배우 게오르기 타라토르킨

이후 라스콜리니코프는 예상치 못 했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노파를 향해 폭발했던 증오가 이상하게도 그 자신을 향해 되돌아온다. 후회와는 다른 기이한 자괴감, 그리고 전 인류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섬뜩한 느낌에 짓눌러 폐인처럼 된다. “끝없는 고독감과 음울한 소외감이 갑자기 뚜렷하게 그의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불안의 하중을 견디다 못해 그는  우연히 알게 된 마음씨 착한 매춘부 소냐를 찾아가 모든 것을 털어 놓는다. 독실한 그리스도교인 소냐는 ‘종교적 차원에서’ 그에게 자백을 종용한다. 처음부터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있던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법적 차원에서’자수를 권유한다. “자수하세요. 그게 당신에게 유리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죄로 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유형지로 이송된다. 소냐는 시베리아까지 그를 따라간다. “언제까지나, 그 어느 곳에서나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에요.” 시베리아에서 그는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에 눈을 뜬다.

범죄와 사법제도에 대한 지대한 관심

2016년 제작된 록오페라 ‘죄와 벌’. 감독 콘찰롭스키는 ’이 작품을 40년 전부터 구상하고 준비했다“고 밝혔다.

2016년 제작된 록오페라 ‘죄와 벌’. 감독 콘찰롭스키는 ’이 작품을 40년 전부터 구상하고 준비했다“고 밝혔다.

1860년대 러시아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강도·살인·사기·성폭력 등 강력 범죄의 증가다. 무엇보다도 수도의 팽창이 원인이었다. 페테르부르크 인구는 1850년부터 1890년대 말까지 약 반세기 동안 50만에서 126만으로 크게 증가했다. 농노 해방과 함께 도시로 밀려든 유휴인력 덕분에 뒷골목에는 악취 풍기는 선술집과 매음굴과 싸구려 셋집과 전당포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뒷골목 문화의 팽창과 더불어 범죄도 폭증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당대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범죄 사건이나 범죄 관련 글을 소설로 들여왔다. ‘죄와 벌’이라는 제목은 1863년 ‘시간’ 지에 실린 포포프의 칼럼 ‘죄와 벌, 형법의 역사에 관한 소고’에서 차용해 왔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 또한 실제 살인 사건을 토대로 한다. 1865년 1월 ‘목소리’ 지는 가게 점원 치스토프가 노파 두 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한 사건을 보도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재판 기록도 꼼꼼하게 살폈다. “재판 기록은 그 어떤 소설보다도 더 흥미롭다. 예술이 다루고자 하지 않는 인간 영혼의 어두운 측면을 조망해주기 때문이다.”

1864년 공포된 사법개혁은 범죄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관심에 부채질을 했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 과제 중 하나인 사법개혁은 낙후된 러시아 법 제도를 뜯어고쳐 “정의와 자비가 지배하는 법정”을 조성하고 “모두가 인권을 향유하는 시민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목표였다. 사법권과 행정권의 완전한 분리, 재판 절차 공개, 구두주의, 대심주의가 개혁의 세부내용이었다.

2016년 1월부터 3월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에서 열린 ‘『죄와 벌』 출간 150주년 기념 특별 전시회’ 포스터(왼쪽 사진)와 전시장 모습

2016년 1월부터 3월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에서 열린 ‘『죄와 벌』 출간 150주년 기념 특별 전시회’ 포스터(왼쪽 사진)와 전시장 모습

도스토옙스키는 쌍수를 들어 개혁을 환영했고, 개혁 과정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수시로 법정을 방문하고, 유명한 재판을 참관하고, 열심히 공판 속기록을 읽었다. 체포·투옥·심문·형 집행을 모두 거친 노련한 ‘전과자’로서, 그는 당대 그 어떤 소설가보다 자세하게 범죄와 사법제도를 소설에 반영시켰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법학도이고 여동생의 약혼자가 변호사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의 구현에 진정 필요한 것은 용서와 사랑

사법개혁의 추이에 주목하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정의의 문제를 성찰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당한 사람들, “학대받고 모욕받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 법과 정의의 차원이 더해졌다. 『죄와  벌』을 시작으로 쏟아져 나온 일련의 대작들에서 그가 제기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 중의 하나는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질문에 직접적인 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정의라는 단어조차 많이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정의를 분석하고 논의하는 대신 다각도에서 정의를 ‘보여준다’. 상식적으로 정의는 의롭고 공정한 것을 의미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정의는 분배와 처벌을 수반한다. 공정하다는 것은 물질적인 나눔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의롭다는 것은 악에 대한 처벌을 간과할 수 없다. 이 모든 나눔과 처벌은 어느 정도 양적인 계산을 피할 수 없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단적인 예다. “한 마리의 벌레 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아 빈곤에 처한 백 명, 천 명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구해줄 수 있다면 그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이 한 문장에 도스토옙스키는 분배와 처벌과 계산 모두를 담아냈다. “1대 100”(한 마리 대 백 명)의 계산에 입각해서 악당(벌레 같은 노파)을 처벌하고 재화를 분배한다(돈을 빼앗아 나누어 준다)는 셈법이다. 주인공의 살인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작동하지만 최소한 정의에 대한 갈증도 그 중 하나다. 그렇다면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정의로운 것인가? 정의를 구현했는가? 이제까지 내가 가르쳐온 학생들 중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대답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을 구상하며 주인공과 배경을 스케치하곤 했다.『죄와 벌』초고 에도 스케치가 여러 장 남아있다. 작가가 생각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얼굴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을 구상하며 주인공과 배경을 스케치하곤 했다.『죄와 벌』초고 에도 스케치가 여러 장 남아있다. 작가가 생각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얼굴

도스토옙스키는 만에 하나 그런 독자가 나올까봐 그랬던지 이중 살인이라는 복선을 깔아놓는다. 사악한 노파를 처벌하러 간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뿐 아니라 노파의 여동생까지 죽이게 된다. 여동생은 짓밟힌 사람들을 대표한다. 한없이 착하고 가난하고 무기력하고 불쌍하다. 지적 장애를 타고 나 언니한테 부림을 당하며 심지어 동네 한량들한테 수시로 성폭행까지 당한다. 바로 그런 사람을 위해서 라스콜리니코프는 도끼를 집어든 것이지만, 살인 과정에서 그 사람까지 죽이고 말았다. “타격은 정확하게 두개골에 가해졌다. 도끼의 날은 금방 윗이마를 지나 거의 정수리까지 그녀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웬만한 호러 무비 뺨치게 잔인한 장면이다. 정의가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는 독자라 할지라도 이것이 정의가 아니라는데 공감할 것이다.

이중 살인 덕분에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는 분명해진다. 처벌과 분배는 정의 실현의 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분노는 정의를 촉발시킬 수 있지만 정의 자체는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훗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정의를 완성시키는 것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라는 사상을 발전시킨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론은 바로 그것, 용서와 사랑을 결여하기 때문에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의 지적은 이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을 계승한다. “정의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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