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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는 파티 피플? 패션은 비즈니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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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호 08면

 ‘영국 여왕이 점찍은 디자이너’ 리처드 퀸

데뷔 3년 차에 영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디자이너 리처드 퀸. 사진 리처드 퀸·리버티 백화점

데뷔 3년 차에 영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디자이너 리처드 퀸. 사진 리처드 퀸·리버티 백화점

‘여왕이 점찍은 디자이너’. 영국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힘이 되는 말이 있을까. 이 화려한 수식어를 낚아챈 행운의 주인공은 데뷔 3년 차에 접어든 신예, 리처드 퀸(Richard Quinn·27)이다. 지난 2월 왕실이 수여하는 ‘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디자인 어워드’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며 2월 열린 그의 패션쇼장 맨 앞줄에는 여왕이 앉게 된 것. 덕분에 영국은 물론 세계가 주목하는 패션계 루키 자리를 굳혔다.

사실 이것은 행운이 아니다. 퀸의 잠재력은 이미 공인됐다. 런던 패션스쿨 세인트 마틴에서 공부한 그는 석사 과정 졸업 작품으로 2017 H&M 디자인 어워드 1등상을 거머쥐었다. 또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는 만들자마자 영국패션협회가 지원하는 프로그램 ‘뉴젠(New Gen)’에 이름을 올렸다. 리버티 백화점과는 지난해부터 2년 연속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수많은 새 얼굴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패션 동네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한 경쟁력은 무엇일까. 중앙SUNDAY S매거진이 지난 6월 그의 런던 스튜디오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아말 클루니, 톰 포드 대신 리처드 퀸의 드레스를 선택  

당황했다. 이게 디자이너의 스튜디오라니. 런던 시내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곳에 자리한 그의 보금자리는 가내 수공업 공장 수준이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놓인 널따란 테이블 위에는 프린트 원단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한 쪽 벽엔 기계들이 즐비했다. 윗층도 마찬가지. 다락방 같은 공간에 기계 석 대가 줄지어 있었다. 하지만 이 어수선한 분위기는 반바지 차림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은 청년 덕분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왕 덕에 이름을 제대로 알렸다.  
“영국패션협회로부터 몇 주 전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임박해서야 정확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왕이 온다길래 일단 좋았다. 내 첫 런웨이쇼에 가장 대단한 손님이 온다는 얘기였으니까. 여왕을 위해 헤드 스카프(머리를 감싼 스카프)도 추가했다. 그래도 여왕보다는 쇼에 집중하려고 했다.”  
지난 2월 열린 그의 2018 가을·겨울 패션쇼 맨 앞줄에는 엘 리자베스 2세 여왕(가운데)과 미국 보그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오른쪽), 영국패션협회 CEO인 캐롤라인 러 시(왼쪽)가 나란히 앉았다.

지난 2월 열린 그의 2018 가을·겨울 패션쇼 맨 앞줄에는 엘 리자베스 2세 여왕(가운데)과 미국 보그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오른쪽), 영국패션협회 CEO인 캐롤라인 러 시(왼쪽)가 나란히 앉았다.

여왕을 직접 만나 들은 말은.  
“쇼가 끝나고 트로피를 받을 때 만났는데 컬렉션, 특히 호일로 만든 옷이 좋다고 했다. 마침 내가 받은 트로피도 호일로 만든 꽃모양이었다.”  
여왕 옆에 안나 윈투어(미국 보그 편집장)가 앉아 있어 더 화제가 됐다.  
“패션협회에서 초대를 한 것 같다. 사실 윈투어는 신진 디자이너들을 제대로 밀어준다. 내 경우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윈투어가 쇼 전에 백스테이지에 와서 컬렉션을 미리 봤고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이후 미국 보그에서 꾸준히 내 옷을 소개해주고 있다.”  
지난 5월 7일 메트 갈라의 레드 카펫에 리처드 퀸의 드레스를 입고 나온 조지 클루니의 부인 아말 클루니

지난 5월 7일 메트 갈라의 레드 카펫에 리처드 퀸의 드레스를 입고 나온 조지 클루니의 부인 아말 클루니

지난 메트 갈라(Met Gala: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매년 5월 첫째 월요일에 유명인들이 모이는 기부금 모금 파티)에서 조지 클루니의 부인 아말 클루니가 당신의 옷을 입어 화제가 됐다. 원래 톰 포드팀이 오랫동안 만든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가 직전에 바꿨다는데.
“그때 쇼에서 호일로 만든 옷을 보고 윈투어가 아말에게 추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요청으로 드레스를 만들어줬을 뿐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진 지원 프로그램에 연거푸 선정됐다. 스스로 생각하는 강점이라면.  
“뚜렷한 비전이 있어서가 아닐까. 패션은 비즈니스다. 돈 때문이 아니라면 이상한 허영심 프로젝트가 된다. 파티에 가서 ‘난 디자이너야’ 하며 즐기는 게 난 별로다. 내가 좋아하는 건 파티가 아니라 디자인이다. 내가 만든 걸 사람들이 입고, 어느 셀레브리티가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린 그게 중요하다. 돈을 벌어 우리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싶고, 브랜드로 남길 원한다. 사람들에게 갖고 싶다는 욕망을 만들고, 매장이 있어 실제 살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게 패션의 포인트다.”  
흔히 신진, 하면 창의성을 이야기하는데.  
“창의성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상업적인 것이기도 하다. 새롭고 신선한 걸 파는 게 패션 아닌가. 창의성과 상업성, 그 연결 고리를 나는 확실히 알고 있고 그래서 도움도 많이 받았다. 특히 뉴젠에 뽑히면서 다른 브랜드와 협업을 하거나 쇼를 준비할 때 협회 패널들과 수시로 소통할 수 있었다. 나혼자 만들고 싶은 옷을 그냥 만드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시장에서 먹힐지 또 돈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조언이 유용했다. 파리 쇼룸에 나가 세계 주요 바이어들과의 자리에 참석한 일도 큰 도움이 됐다. 벌써 한국 편집숍 네 군데에도 들어가 있다.”  

상금으로 프린트 기계 사서 렌트

이런 ‘비즈니스 마인드’는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H&M 디자인 어워드에서 받은 상금을 남다르게 활용했다. 보통 통장에 넣었다가 다음 컬렉션 비용으로 쓰지만, 그는 지속가능한 수익 모델에 투자했다. 시내에서 떨어진 곳이라도 넓은 공간을 마련하고 프린트 기계들을 사들인 것. 바로 공장 같던 스튜디오의 내막이었다. “한 대에 2만5000파운드(한화 3680만원)짜리도 있다”고 소개하는 그의 얼굴엔 뿌듯함이 역력했다.

리처드 퀸 스튜디오 2층에는 소형 프린트 기계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리처드 퀸 스튜디오 2층에는 소형 프린트 기계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가내 수공업 공장 같 은 작업실 1층 모습

가내 수공업 공장 같 은 작업실 1층 모습

프린트 기계를 샀다는 게 놀랍다.  
“리처드퀸의 컬렉션은 앞으로도 계속 프린트가 위주가 될 것이다. 내가 패션을 하게 된 자체가 프린트 때문이었으니까. 원래 나는 사진에 관심이 많았고, 팀 버튼 영화처럼 시각적으로 감각 있는 영화를 좋아했다. 그러다 가상이 아닌 실제의 비주얼이 뭔지 고민하며 패션을 택했고, 프린트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내게 패션과 프린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공부한 걸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매번 프린트를 디자인만 해서 이탈리아 공장에 보내느니 내가 직접 해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화려한 프린트와 호일 소재의 옷을 선보인 리처드 퀸의 2018 가을·겨울 컬렉션

화려한 프린트와 호일 소재의 옷을 선보인 리처드 퀸의 2018 가을·겨울 컬렉션

한두 대도 아닌데.  
“틈새 시장이 있다고 직감했다. 나처럼 프린트를 해야 하는 신진들이 수두룩하지 않나. 이들이 우리 스튜디오에 와서 작업을 하면 되는 거였다. 요즘은 제프리 찰스, JW 앤더슨 외에도 버버리까지 여기서 작업을 한다. 철저하게 비밀을 보장하는 원칙 덕에 여러 패션하우스가 와도 문제가 없다. 신진일수록 모든 걸 아웃소싱하고 다른 데 의지하면 남는 게 없다. 이 수익 모델은 아직 성공적이고 돈도 잘 벌고 있다.”  

프린트에서 정체성을 얻는 리처드퀸의 별칭은 그래서 ‘프린트의 왕자(prince of prints)’다. 다양한 프린트를 섞고 겹쳐 강렬하다 못해 압도적이다. 게다가 머리만이 아닌 얼굴 전체를 감싸는 드라마틱한 스타일링으로 프린트의 정점을 찍었다.

프린트가 주는 매력이 뭔가.  
“충돌한다는 점이다. 색과 색이, 무늬와 무늬가 충돌하는 거다. 단순한 네이비 컬러의 수트로 얼마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프린트를 얹었을 때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프린트를 구상하면서도 늘 두 가지 이상을 떠올린다. 지난 쇼처럼 예쁜 꽃무늬 드레스도 얼마든지 강렬하고 파괴스러울 수 있다.”  
리처드 퀸은 올 7월 영국 리버티 백화점과 협업한 다양한 액세서리 제품을 선보였다. 그가 석사 졸업 작품에서 리버티 꽃무늬 원단을 쓴 것이 계기가 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인연을 이어갔다.

리처드 퀸은 올 7월 영국 리버티 백화점과 협업한 다양한 액세서리 제품을 선보였다. 그가 석사 졸업 작품에서 리버티 꽃무늬 원단을 쓴 것이 계기가 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인연을 이어갔다.

몸은 물론 얼굴까지 가리는 스타일링이 인상적이었다.  
“폴 해리스라는 1960년대 아티스트로부터 영감 받았다. 석사 때부터 관심이 있던 인물인데, 지난해 리버티백화점과 협업한 컬렉션부터 지속적으로 모티브를 얻고 있다. 이번 시즌은 여기서 좀 멀어지려고 하는데, 그럼에도 완전한(full) 프린트룩을 만들면 임팩트가 확실해져서 좋아한다.”  
몸 전체를 프린트 스카프로 감싼 스타일링

몸 전체를 프린트 스카프로 감싼 스타일링

발렌시아가의 컬렉션과 비슷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조금만 조사해보면 내 석사 작업이 그들의 플로럴 스타일링보다 4개월 앞서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내 친구가 거기서 일하는데, 그들의 작업 보드에 내 이미지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며) 그것까지 볼 것도 없다. 리처드 퀸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지난해에 우리가 만든 프린트들이 다 있다. 발렌시아가는 이걸 8개월 뒤에 선보였다. 베트멍도 검색해 보면 우리처럼 얼굴을 스카프로 가린 똑같은 이미지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이미 4~5개월 전에 한 꽃무늬를 이제야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커갈수록 그렇게 카피하기는 힘들 거다.”  
물방울 무늬, 꽃무늬를 충돌시킨 드레스

물방울 무늬, 꽃무늬를 충돌시킨 드레스

“팔릴 옷을 만들고, 많이 팔고 싶다”  
수많은 패션 루키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사라졌다. 전문가들의 평가와 시장의 반응이 다른 경우도 있다. 넉넉지 않은 자금으로 컬렉션조차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 부지기수다. 리처드 퀸 역시 위험 요소가 있다. 스트리트 웨어가 메가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오트쿠튀르 감성의 디자인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세계적 모델인 애드와 아 보아(왼쪽)와 함께 무대 인사를 하는 리처드 퀸

세계적 모델인 애드와 아 보아(왼쪽)와 함께 무대 인사를 하는 리처드 퀸

스트리트 무드를 따르지 않는 불안감이 없나.  
“스트리트 패션 트렌드를 보면 좋다, 똑똑하다는 생각도 하고 나도 사고 싶을 때가 있지만, ‘내 것’은 아닌 게 확실하다. 난 내 고객을 알고, 스타일을 알고, 내가 어떤 디자인을 하는 걸 좋아하는지 안다. 각자 세상에서 행복한 순간이 다른 거랑 똑같은 거다. 가끔 내가 보머 재킷을 디자인한다면 재미있겠다 싶지만, 지금은 이걸 할 때가 아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데뷔하고 몇 년 후 없어진다. 각오라면.  
“첫째, 팔릴 옷을 만든다. 둘째, 많이 팔고 싶다. 이 두 가지다. 그러려면 새로운 시도밖에 없다. DNA는 같아도 다른 관점으로, 다른 비전으로 세상에 맞추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해에 저 플로럴자켓 봤는데, 또?’ 밖에 안 된다. 발렌시아가가 카피 할 걸 뭘로 만들까, 그게 우리의 모토다(웃음). 농담이고, 그냥 다음 것을 생각하는 거다. 10년 뒤에도 나는 살아남길 바란다.” ●

런던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리처드 퀸·중앙포토·리버티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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