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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김정은 호통 소리 커진 경제 현장 … 통 큰 개혁 멀어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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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정은의 북방 행보가 심상치 않다. 지난달 말부터 북·중 접경지역에 머물며 경제현장을 잇달아 찾는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해 보인다. 공장과 기업소를 방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호통소리도 부쩍 늘었다. 최고영도자를 맞이해 어찌할 줄 몰라하는 공장 말단 간부에게 관리 부실을 질책하며 “마구간 같다”는 직격탄을 퍼붓는다. 이런 목소리는 관영 선전매체를 통해서도 그대로 전해진다. 조선중앙TV에 드러난 김정은의 찡그린 표정은 뭔가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북·미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맞닿은 지역을 돌며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대목도 석연치 않다. 김정은 체제가 비핵화를 넘어 체제 생존을 위한 개혁·개방에 나설 것이란 우리 사회 일각의 기대 섞인 관측과도 궤를 달리한다.

북·중 변경 체류 중인 김정은 #공장 찾아 “마구간 같다” 질책 #트럼프와 정상회담 치렀지만 #개혁·개방의 큰 그림 못 그려 #싱가포르 야경보며 “배우겠다” #다짐 외면한 허송세월 안된다

북한 김정은의 북·중 변경 체류는 지난달 말 우리 정보 당국 대북 감시망을 통해 처음 포착됐다. 평북 신의주 일대의 경비와 주민 통제가 강화됐고, 이곳에 주둔하는 북한군 1524부대 등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용하는 방탄 리무진과 수행원 및 경호·의전 인력을 태운 차량의 이동 정황도 파악됐다. 김정은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압록강변 신도군이다. 비단섬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갈대 군락지로, 특구 개발이 추진되다 중단된 황금평이 속해있다.

김정은은 고급 승용차나 전용 요트를 이용하지 않았다. 낡고 먼지가 덮인 소형 세단으로 움직이고, 몇 사람이 탈 정도의 작은 모터보트를 탄 장면이 북한 매체를 통해 지난달 30일 공개됐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집권 초인 2012년 8월 노후한 목선을 타고 서해 최전방 무도방어대를 시찰했던 때를 연상케 하는 모습을 연출했다”고 귀띔했다. 흙먼지가 묻은 옷차림도 드러났다. ‘인민경제’를 챙기려 동분서주하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김정은이 먼저 들린 곳은 갈(갈대)종합농장 작업반이다. 그는 “신도군을 주체적인 화학섬유 원료기지로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특산물인 갈대를 이용한 섬유 증산을 강조한 것이다. 다음 방문지인 신의주화장품공장에는 부인 이설주가 함께 나타났다. 김정은이 “봄향기화장품으로 명성이 자자한 신의주화장품공장에 언제부터 한번 와보려 했는데 오늘에야 왔다”고 운을 떼면서 분위기는 누그러졌다. 그는 “공장 일꾼들과 노동계급의 이악한(끈기 있는) 투쟁 정신과 근면한 일본새(업무 태도)에 탄복하게 된다”며 “만족에 대만족”이라고 말했다. 평양 시내에 봄향기화장품 전문 판매점을 내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하지만 김정은의 웃음을 여기에서 그쳤다. 신의주방직공장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는 “공장이 과학기술에 의거해 생산을 정상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재와 자금·노력 타발(투정)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우리식의 국산화·현대화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는 때에 이 공장은 난관 앞에 주저앉아 일떠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동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불만은 이어진 신의주화학섬유공장 현지 지도 때 폭발했다. 김정은은 “현대화 공사를 진행한다는 이 공장에서는 보수도 하지 않은 마구간 같은 낡은 건물에 귀중한 설비들을 들여놓고 시험 생산을 하자고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동신문은 지난 2일자 보도에서 “최고영도자(김정은) 동지께서는 ‘숱한 단위들에 나가보았지만 이런 일꾼들은 처음 본다’고 엄하게 지적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는 김정은이 백두산 지역인 양강도 삼지연군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어졌다. 감자 농사를 주로 하는 중흥농장에선 “20년여 년 전에 장만해 놓은 농기계들을 기계화의 본보기로 내세우고 있다”고 문제 삼았다. 삼지연감자가루생산공장 방문 때는 “공장 건설 초기 기술 신비주의에 빠져 경제적 타산이 맞지 않는 설비를 차려놓고 생산에 지장을 줬다”고 지적했다.

김정은의 북·중 접경지 체류와 경제현장 방문은 지난달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과 세 번째 중국 방문(6월 19~20일) 직후 이뤄졌다. 첫 행선지인 평북 신도군과 신의주시는 북한의 대표적 경제특구 중 하나인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가 위치한 곳이다. 김정은 집권 후 설정한 5개 경제특구와 19개 지방급 경제개발구 가운데 핵심이다. 이 때문에 김정은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교감 아래 황금평 개발 재추진을 주축으로 북·중 경협에 드라이브를 거는 행보란 전망이 제기됐다. ‘평양의 트럼프 타워’ 등을 내세운 미국의 대북진출 움직임과 비핵화 압박을 견제·회피하기 위한 술수란 얘기다.

하지만 김정은의 동선과 언급을 꼼꼼히 짚어보면 실망스러운 대목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북부 변경의 낙후된 공장·기업소를 찾아 설비 현대화와 생산 증대를 주문하는 게 얼마나 효과가 있느냐 하는 문제다. 갈대를 채취해 종이나 옷감을 만드는 생산 시스템에 대해 대북 전문가들은 회의적 반응이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신의주화학섬유공장을 찾은 김정은은 “교육 사업에서 지금 걸리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종이를 수요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교과서나 학습장을 생산할 종이를 원만히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경제의 근본적 해법보다 대증요법에 매달리는 형국이다.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은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이후 정세변화를 반영한 큰 그림을 김정은 위원장이 아직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현장의 말단 책임자를 질책하고 ‘본때 보이기’ 방식으로 처벌하는 걸 두고도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김정은은 앞서 2015년 5월 대동강자라공장을 방문했을 때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업적을 말아 먹었다”며 지배인을 처형토록 지시한 것으로 탈북·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전했다.

이런 모습은 할아버지인 국가주석 김일성의 통치 스타일과 차이가 난다. 김일성은 관련 회의를 소집해 노동당과 내각의 최고위급 책임간부를 질책했고, 현장에 나가서는 실무자들의 고충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망 직전인 1994년 7월 경제부문 책임일꾼 협의회를 주재한 김일성은 김환 당시 화학공업담당 부총리를 일으켜 세운 뒤 “비료공장 설비보수를 책임지라 여러 번 지시했는데 아직도 집행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석 선박공업부장에겐 “큰 짐배 100척을 만들라 한지 여러 해 됐는데 아직도 안 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부족한 원자재나 기술은 돈을 주고서라도 외국에서 사와야 한다”고 10여 차례나 강조했다.

김정은은 꼭 한 달 전 싱가포르의 밤거리를 돌아본 뒤 “귀국의 경험을 많이 배우려 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권위주의 리더십을 유지하며 경제발전을 이룬 싱가포르식 개발 모델에 관심을 드러낸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김정은의 발걸음은 여전히 어두운 변경지대에 머물고 있다. 두 눈 가득 담아간 화려한 야경을 외면하며 허송세월하기에는 여름이 너무 짧을 수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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