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에는 80년대 팝송이었고 동물원엔 모차르트였다. 대부분의 멋진 곳에선 언제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음악은 듣기 좋았다. 동물원의 코뿔소와 원숭이들이 듣는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은 아무래도 좋은 교육을 받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제대로 연주하는 음반인 것 같았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수준 높은 음악(애초에 음악에 수준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을 안 틀고 ‘이상한’ 음악을 트는 게 잘못이 아니다.
바닷가라고 파도 소리가 쏴쏴 멋지게 늘 들리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지역 주민들이 타고 다니는 트럭 소리, 아이들이 난데없이 지르는 고함, 사람들의 무의미한 발소리가 지배적이다. 동물원에서도 사자의 용맹한 울음소리, 코끼리가 물 뿜는 소리가 항상 들리지는 않는다. 탈탈 끌려가는 유모차 소리, 사람들이 점심으로 뭘 먹을지 의논하는 대화가 들린다.
이런 소리는 가려야 하는 소음일까. 문제는 여기에 있다. 왜 공간의 고유한 소리에 자신이 없을까.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내는 소리는 다 의미가 있다. 그 소리를 어떤 음악으로든 가릴 이유는 없다.
예술가들이 녹음기를 가지고 각 도시를 다니며 있는 그대로 소리를 담는 일을 시작한 게 벌써 수년 전이다. 뉴욕타임스는 2015년 기사에서 뉴욕 곳곳의 맨 얼굴 같은 ‘맨 소리’를 담았다. 공공도서관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한 사무실에서 직원이 감자 칩 봉지를 뜯는 소리를 녹음해 독자도 들을 수 있게 했다. 기사의 제목은 ‘건축가들에게: 소리는 중요합니다’. 공간에서 소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사람들은 특정한 소리를 들으면 어떤 공간을 떠올리고 감정도 끌어올린다. 여기에 짙은 화장을 덧입히는 건 사람의 기억과 감정에 대한 무례한 개입이다.
있는 그대로의 소리는 그때뿐이고 다시 만들어낼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많은 생명체가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조합이기 때문이다. 이걸 있는 그대로 듣는 것은 귀한 체험이다. 상점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고르거나 돈을 치르는 소리도 소중하다. 음악을 거리까지 들리도록 틀 필요가 없다. 신나는 노래가 나와야 신나는 수영장이 되는 것도 아니다. 주위 사람들의 콧바람 소리가 더 신나지 않나. 부디 이번 여름에는 화장 안 한 맨 소리들의 승리를 빌어본다.
김호정 아트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