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중심 議題가 안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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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통령은 그 나라 제일의 발제자(發題者)다. 민주사회에서는 항상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의제를 제기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힘있고 영향력있는 발제자는 대통령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젠가 언론에 대해 '공정한 의제'를 주문했지만 실은 우리사회의 의제를 만들고 리드해 나갈 가장 큰 책임을 진 사람은 盧대통령 자신이다. 대통령은 언론의 의제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리드해야 할 입장이다.

역대 대통령은 나름대로 그 시대의 중심의제를 제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와 새마을운동 등을 제기했고, YS는 군사정권 잔재 청산을, DJ는 외환위기 극복을 내세웠다.

*** 추석대목 택시기사가 들려준 말

盧대통령도 지난 9개월간 많은 의제를 내놓았다. 한미(韓美)대등론.노사형평론.자주국방론.동북아경제 중심론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전임자들과 달리 盧대통령의 의제는 우리 사회의 중심의제로 자리잡지 못했다.

한.미 대등론,자주국방론은 한.미동맹을 흔든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고, 이 시절 국민 가슴 속에 절실히 와닿는 의제가 못된 감이 있다. 노사형평론도 잇따른 파업 속에 대통령의 친노(親勞)성향을 드러낸 것이라 하여 비판을 받았고, 동북아중심론은 거의 기억되지 않은 의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盧대통령의 의제는 대부분 성공하지 못한 채 내부갈등만 자극하는 부작용을 양산(量産)한 감이 있다. 그리고 당선 후 9개월이 되도록 아직 국민의 힘을 끌어모으는 중심의제를 형성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중심의제가 없는 국정운영이란 마치 목표나 기준없는 임기응변식 국정이 되기 쉽고 국민에게 지속적인 기대감이나 예측성을 주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2003년 9월 이때 우리 사회가 밀고나갈 중심의제는 뭣이 돼야 할까. 추석대목에 만난 택시기사가 이런 말을 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월급 주는 기업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 누가 돈을 줍니까. 월급 주는 기업인이 열 대통령보다 낫습니다."

그렇다. 문제는 단순하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다. 한걸음 나아가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문제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는 딴 길을 걸어온 것 같다. 코드.386.반미.촛불시위.파업.신당…. 이런 문제로 시간과 정력을 대부분 날려버린 게 아닌가.

먹고사는 문제가 우리의 중심의제라면 나머지 문제들은 다 거기에 맞춰 판단하면 된다. 중심의제에 부합되고 기여가 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고 옳은 것이라고 치자. 중심의제에 방해가 되고 지장을 주는 것은 나쁜 것, 그른 것이라고 치자. 지금 우리에겐 핵폐기장 건설문제.새만금 문제.농산물개방문제 등 내부 갈등의 골이 깊게 파인 많은 현안이 있다.

결단이 늦어지는 바람에 막대한 예산낭비와 국익손실이 우려되는 문제들이다. 더구나 이라크 파병 문제가 본격 제기되면 심각한 국론분열이 우려된다. 이런 문제들 역시 중심의제에 맞춰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찬반(贊反)에 귀기울이다 보면 또 다시 결단없는 방황이 오래가게 된다. 더 이상 헷갈리고 헤매서는 안된다.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결단을 내리자.

*** 먹고 사는 문제 집중할 때 됐다

盧대통령도 최근엔 먹고사는 문제를 말하기 시작했다. 2만달러 시대와 경제살리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말에 '무게'와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盧대통령은 정말 경제살리기가 우리의 중심의제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말만 해서는 안된다. 정부의 모든 정책과 역량이 거기에 집중돼야 한다. 그런 정책목표를 가장 잘 추진할 가장 능력있는 인물들을 요소에 배치해야 한다. 경제살리기를 잘하는 사람을 상(賞)주고 승진시키고, 방해하는 사람.딴소리하는 사람은 처벌하고 밀어내야 한다.

끊임없이 국회와 국민을 설득하고 경제살리기에 적합한 사회분위기와 여론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구체적 노력없이 구호로만 경제살리기를 외치고 책상 위의 서류 몇장만 돌아다닌다면 그것은 중심의제에 대한 인식도, 추진능력도 없다는 얘기다.

우리가 더 이상 헤매서는 안된다는 국민적 합의는 이제 이뤄졌다고 생각된다. 먹고사는 문제-우리의 중심의제에 집중할 때가 됐다.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