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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긴 호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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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역사의 흐름이 실감되는 요즈음이다.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나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보면서 70년이라는 긴 시간을 떠올리는 이가 나뿐만 아니리라. 작년 말까지도 거친 말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핵 단추를 누르니 마느니 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일생 처음 한반도에서 전쟁, 그것도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겉으론 태연해하면서도 실은 불안했었다.

음악의 세부는 전체구조의 맥락에서 읽어야 #역사의 흐름을 조감하는 거시적 통찰이 필요

최근 우리는 일련의 역사적 경험을 하고 있다. 지난 봄, 새들이 우는 숲속에서 남북한 정상이 앉아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전 겨울, 우리는 깔끔하게 겨울올림픽의 큰 잔치를 치러냈다. 작년, 첫 여성대통령은 감옥에 갔고 새 대통령은 취임 행사도 못하고 일을 시작했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파면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탄핵이 법질서 아래 집행되는 것을 경험했다. 가슴이 철렁하는 일들이었으나 시민들은 일상 속에서 소화해 냈다. 그리고 그 전에 ‘촛불’이 있었다.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힘이 쓰나미처럼 닥쳤었고 지난 지방선거의 결과를 보면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솅커라는 이론가는 음악을 거시적으로 통찰하는 분석으로 유명하다. 그에 의하면 조성이 있는 음악작품은 화성적으로 “I-V-I(즉 으뜸-딸림-으뜸화음)”, 선율적으로 “미-레-도”로 요약된다. 친숙한 언어로 바꾸면 기-승·전-결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조가 음악의 작은 세부에서 큰 윤곽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보여주기 위하여 몇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음악 설계도면을 그린다. 제일 밑에는 분석하는 곡의 중요한 이벤트들을 악보에 요약한다. 작은 ‘I-V-I’과 작은 ‘미-레-도’ 진행들이 곡의 세부 구조와 맥락을 나타낸다. 그 위에 이를 단순화한 악보를 겹친다. 여기에도 ‘I-V-I’의 구조들이 나타나는데 더 큰 맥락에서 보여주는 기-승-전-결이다. 또 그 위에 더 단순화시킨 악보…, 제일 위에는 처음에 언급한 ‘I-V-I’과 ‘미-레-도’의 기본골격만 남는다.

결론만 보면 솅커의 분석은 싱겁다. 그래서 “음악의 아름다움은 디테일에 있다. 음악을 기-승-전-결의 구조로만 보는 것은 ‘사람은 낳고 살고 죽는다’는 뻔한 말과 무엇이 다른가?” 라고 냉소하는 비판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솅커의 분석을 단순화의 방향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의 분석은 세부가 전체 맥락 속에서 가지는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층위를 비교하면서 보아야 그 의도가 살아난다. 예컨대 “구조적으로 가장 중요한 절정은 어디인가?” “이 음은 앞 뒤의 어떤 음, 어떤 부분과 연결되는가?” “이 ‘I-V-I’의 맺음은 잠정적인 것인가 최종적인 것인가?” 등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난 70년을 솅커처럼 분석한다면 어떻게 될까? 분석하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제일 밑의 층은 이렇게 요약되리라. 8·15해방,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경제발전, 10·26, 5·18민주화운동, 6·29선언, 88올림픽, 6·15남북정상회담, 세월호 참사, 촛불혁명, 대통령탄핵, 4·27남북정상회담…. 모두 엄청난 사건들이었으니 그 하나하나 안에도 여러 층위의 I-V-I의 구조가 들어있을 것이다. 이 사건들을 단순화한 그 위의 층은 어떻게 될까? 분단-전쟁-휴전-종전? 그러고 보니 이해가 된다. 왜 종전선언이 자꾸 언급되는지. 70년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려니 그것이 자연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다.

마지막에 아직 빠진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통일, 즉 분단 구조의 논리적 맺음이다. 다만 아직 멀어 보인다. 그것을 시야에 담으려면 북한도 포함된 한반도를 바라보는 더욱 긴 시간의 거시적 통찰이 필요하리라.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도 말했다. “우리는 긴 호흡이 필요합니다.”

어제 오늘의 일, 일년 이년의 일만 생각하며 일희일비하다가는 중요한 판단을 놓친다. 때로 높이 떠올라 삶과 역사의 큰 흐름과 굴곡을 조감할 필요가 있다.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