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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이버수사, 디지털 증거분석…이 사람 손에서 태어났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양근원 용인서부경찰서장. 한영익 기자

양근원 용인서부경찰서장. 한영익 기자

칠흑 화면에 깜빡이는 '하얀 커서'에서 찾은 길

“그 사람은 인생이 곧 한국 사이버수사의 역사죠”
사이버수사에 몸 담지 않았던 경찰관들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많았다. 양근원(55ㆍ경찰대 2기) 용인 서부경찰서장 얘기다. 통신범죄 수사의 개념조차 없을 때부터 맨손으로 시작해 지금은 경찰의 사이버 수사 발전상에  그의 흔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원래는 공대에 진학하고 싶었죠. 어른들 뜻대로 경찰대에서 법학을 전공했어요. 공학도를 지망해서인지 컴퓨터를 처음 본 순간부터 호기심이 막 생기더라고요.”

양 서장은 경찰대에 다니던 1980년대 우연히 애플사의 '애플2'를 보고 컴퓨터에 관심을 가졌다. 88년 파출소장을 할 때는 공용으로 쓰던 XT컴퓨터의 칠흑 같은 화면, 하얀 커서만 깜빡이던 도스(DOS) 명령어 화면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결국 부인 몰래 월급의 2배(40만원)에 달하는 16비트 IBM컴퓨터를 용산전자상가에서 샀다. PC통신 하이텔에 ‘법화산’이란 판례 검색 프로그램 을 만들어 올려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미약했던 첫 출발, 시작은 신종범죄 수사 담당자

경찰 최초의 통신범죄 수사 담당자가 된 것도 컴퓨터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지난 94년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소문 때문에 경찰청 형사국에서 신종범죄를 담당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한국 최초의 정식 사이버수사조직인 1997년 경찰청 컴퓨터범죄수사팀 멤버들. [양근원 용인서부경찰서장 제공]

한국 최초의 정식 사이버수사조직인 1997년 경찰청 컴퓨터범죄수사팀 멤버들. [양근원 용인서부경찰서장 제공]

이듬해인 95년부터 상업적인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퍼지며 그의 일거리도 늘었다. 담당자 한 명으로 한계를 느꼈던 그는 97년 경정 진급과 동시에 상부에 건의해 조직 규모를 확 늘렸다. 10여 명 규모의 '컴퓨터범죄수사팀'이 창설됐다. 현재 경찰청 사이버안전국의 전신으로 한국 최초의 정식 사이버수사 조직이다. 양 서장이 팀장을 맡았다. 현재 경찰 사이버수사요원은 전국에 1500명 이상이다.

당시 해결했던 사건 중에 양 서장은 2001년 4월 780만명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사이버수사 경험자가 없어 임기응변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경험 때문이다. 당시 그가 확보한 건 유출된 개인정보 데이터가 전부였다. 피해를 입은 사이트가 어느 곳인지도 몰라 막막했다고 한다.

양 서장은 “데이터베이스에 제 주민번호를 입력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제 정보도 유출된 걸 확인하고 가입한 사이트를 일일이 찾아다닌 끝에 피해업체를 찾았다”고 떠올렸다. 그는 “업체 측은 해킹 당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추적 끝에 보안업체 연구원 출신 3명을 붙잡았다”고 말했다.

1999년 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장으로 재직할 당시 양근원 당시 대장. 이듬해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사이버테러대응센터로 확대 개편됐다. [양근원 용인서부경찰서장 제공]

1999년 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장으로 재직할 당시 양근원 당시 대장. 이듬해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사이버테러대응센터로 확대 개편됐다. [양근원 용인서부경찰서장 제공]

24년 지났지만 사이버수사 곳곳에 흔적 

 사이버수사에 몸 담은지 24년이 흐르는 동안 그의 족적은 뚜렷하다. 지방경찰청과 경찰서마다 있는 사이버수사팀의 존재, 민간 전문가를 사이버수사관으로 선발하는 '사이버특채' 제도 모두 양 서장의 작품이다.

 각종 수사물이나 미드에 나오는 '디지털포렌식센터'도 그가 산파 역할을 했다. 역시 국내 최초다. 지금은 각 지방경찰청마다 설치돼 매년 수만건 넘는 디지털증거를 분석하지만 당시에는 예산 따내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양 서장은 “청와대와 국회, 기재부와 행안부를 열심히 들락거리며 설명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연간 수십건 증거분석을 하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양 서장은 요즘 경찰 생활의 황혼기를 맞았다. 계급 정년 탓에 올해 경무관 진급을 하지 못하면 내년 초 공로연수를 끝으로 제복을 벗게 된다.
 “제가 처음 사이버수사를 시작할 때는 컴퓨터와 관계 되면 그게 첨단범죄였어요. 지금은 다르죠. 후배들이 암호화폐나 다크웹 같은 신종 범죄에 더 집중할 수 있게 선배들이 환경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한영익 기자 hany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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