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정치권은 JP의 실사구시 정신을 되새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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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 현대 정치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또 하나의 별이 졌다. 지난 주말 타계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파란만장한 한국 정치사를 온몸으로 써낸 ‘풍운의 정치인’이었다. 그런 만큼 그 어떤 정치인보다 영욕과 명암이 교차하는 게 필연일 수밖에 없다. 좋게 보는 사람들에게 그는 전쟁으로 파괴된 척박한 땅에서 산업화와 근대화를 일궈낸 혜안을 가진 정치인이며, 최초의 정권 교체를 주도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에도 기여한 ‘킹 메이커’였다. 하지만 나쁘게 보는 이들에게 그는 군사 쿠데타로 한국의 민주화를 뒤로 돌리고 독재체제를 공고히 했으며, 3당 합당이라는 ‘야합’으로 이 땅의 정당정치를 후퇴시켰고, 권력을 위해 지역주의를 선동함으로써 지역감정의 고질을 식재(植栽)한 ‘처세의 달인’일 뿐이었다.

타계한 JP, 영욕과 명암 엇갈리지만 #이념보다 실용으로 산업화 길 열어 #진영 초월한 협력 배워 통합정치를

두 가지 시각 모두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는 것은 곡절과 파란이 많았던 한국 현대사를 용기 있게 마주하고 주도적으로 헤쳐 나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인생과 철학이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점철된 까닭이다. 빛깔 좋은 명분보다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현실을 중시한 그는 야당과 학생운동 세력들로부터 ‘제2의 이완용’이라는 욕을 들으면서도 대일 식민지 배상금 협상을 관철해냈다.

개개인의 피해에 대한 책임을 국가 간 협상으로 말소하는 게 가능한가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때 일본으로부터 받은 8억 달러가 없었더라면 한국의 근대화는 요원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경제적 근대화보다 정치적 민주화에 더 중점을 두었던 다른 신생국들 중에서 선진국의 문턱을 넘은 나라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혜안은 더욱 빛난다. 그의 말대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유와 민주주의도 누릴 수 없다”는 게 진리인 것이다.

이 같은 실사구시 정신과 함께 그는 끝까지 이념이나 진영을 좇아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지 않는 선이 굵은 정치를 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으로 탄생시킨 DJP(DJ+JP) 공동정권은 일부 보수세력의 비난을 받긴 했지만 한국 정치 최초의 수평적 정권의 탄생이자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통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진영과 이념을 초월해 연대·협력할 줄 알았던 김 전 총리의 정치철학은 갈등과 반목이 지배하는 우리 정치 현실에 큰 울림이 될 수 있다. 특히 절체절명의 고사(枯死) 위기에서도 내홍과 불통만 거듭하고 있는 보수정당들에 그렇다. 이념과 진영논리보다는 실용과 민생, 즉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김 전 총리의 실사구시가 진정한 보수의 가치인 것이다.

김 전 총리는 생전에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말했다. 기업인은 노력한 만큼 과실을 얻지만 정치인은 노력해서 얻은 과실을 국민에게 나눠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면 이념과 계파 싸움은 원인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정치권은 영면한 김 전 총리의 실사구시 정신을 되새겨 분열이 아닌 통합의 정치를 이뤄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