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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가수들의 환상적 무대가 그저 일상인 곳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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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호 24면

세계 최고의 오페라극장 빈 슈타츠오퍼를 가다 

무대막은 매시즌 새로운 현대미술 작품으로 교체된다. 6월28일까지 존 발데사리의 ‘졸업’을 볼 수 있다.

무대막은 매시즌 새로운 현대미술 작품으로 교체된다. 6월28일까지 존 발데사리의 ‘졸업’을 볼 수 있다.

 예술의 도시 빈. 대부분 19세기 후반 지어진 주요 명소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엄을 드러내는 화려한 건축물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지붕과 정면 파사드에 조각상을 잔뜩 짊어지고 유난히 공을 많이 들였다 싶은 르네상스 풍의 건물이 있다. 구스타프 말러가 1897년부터 11년간 음악감독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빈 슈타츠오퍼(Wiener Staatsoper)다. 프랑스 파리 오페라,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과 함께 세계 3대 오페라극장으로 꼽히는 이곳은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인 빈 필의 모체인 빈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와 세계에서 가장 바쁜 성악가들이 최고의 오페라를 일상처럼 공연하는 곳이다.

링슈트라쎄 중심구역 대로변에 위치해 행인들의 발길을 붙드는 빈 슈타츠오퍼.

링슈트라쎄 중심구역 대로변에 위치해 행인들의 발길을 붙드는 빈 슈타츠오퍼.

오페라의 유령이 정말 있다면 여기도 살고 있지 않을까. 빈 슈타츠오퍼도 파리 오페라 극장의 샹들리에 전설 못지않은 비극적 사연을 품고 있다. 1869년 개관 무렵, 링슈트라쎄(Ringstrasse) 건설에 왕가의 사활을 건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링슈트라쎄 가장 중심구역에 세계 최고의 오페라극장을 세우고자 했고, 오페라를 유별나게 사랑하는 빈 시민들까지 너도 나도 건축 디자인에 참견과 비판을 하고 나섰다. 결국 공사 도중 인테리어 디자이너 반 데어 뉠은 이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고, 이후 혼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당하던 건축가 지카르트부르크마저 개관 직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극장 건축에 삶을 바친 두 영혼이 개관 공연 ‘돈 조반니’를 어디선가 지켜보지 않았을 리 없다.

음악감독 공석에도 명성은 흔들림 없이  

멀리서부터 범상치 않은 건물의 포스에 이끌려 다가서면 우측 광장의 로렐라이 분수대에 세 명의 여인 조각이 먼저 관객을 맞는다. 각각 ‘사랑’ ‘슬픔’ ‘분노’라는, 오페라가 담아내는 감정을 형상화한 모습이다. 내부로 들어가 거대한 성전으로 들어가는 듯한 중앙계단을 오르면 회랑의 아치 기둥 사이사이에서 여신상들이 관객을 내려다보고 있다. 벽면은 천사들의 부조로 가득하다. ‘마술피리’를 주제로 한 모리츠 폰 슈빈트의 프레스코화는 2차 대전 공습에도 살아남은 원형 그대로다.

로비 중앙계단

로비 중앙계단

2층 중앙로비 끝에 위치한 로댕의 말러 상을 비롯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헤르바르트 폰 카라얀 등 이곳을 거쳐간 음악가들의 두상이 도처에 버티고 있다. 2차 대전 당시 무대와 객석 대부분을 소실시킨 공습에도 살아남은 것이 이 로비와 중앙계단이라니, 거대하면서도 어딘가 아늑한 이 성전에 저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식음료를 파는 홀의 말러 초상화 앞에 덩그러니 놓인 그랜드피아노가 금방이라도 소리를 낼 것 같다.
말러는 오늘날 빈 슈타츠오퍼의 명성을 있게 한 주인공이다. 11년간 오케스트라의 고질적인 인습을 타파하고 연주의 완성도를 높이며 레퍼토리를 확장시킨 끝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어냈다. 카라얀·로린 마젤 등 20세기 거장들이 그 뒤를 이었지만, 지금은 음악감독이 없다. 2010년부터 음악감독을 맡았던 프란츠 벨저 뫼스트가 도미니크 메이어 극장장과의 갈등으로 2014년 갑작스럽게 사임한 이래, 파리 오페라 극장의 필립 조르당이 2020년 부임할 때까지 공석이다. 하지만 빈 슈타츠오퍼에 대한 관객의 신뢰는 흔들림이 없다.

음악보다 미술 먼저 무대막은 현대미술 작품  

지난달 25일 ‘삼손과 데릴라’ 공연은 두달 전부터 매진이라 당일 취소표를 가까스로 구해 들어갈 수 있었다. 매일 오후 극장 앞엔 입석 대기 행렬이 길게 늘어서는데, 3시간 이상 공연하는 오페라를 내내 서서 구경해야 하니 왠만한 체력과 열정 없이는 견디기 힘들지만, 10유로도 안되는 비용으로 최고의 오페라를 볼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기꺼이 고난을 자처하고 있다.

객석에 앉으면 음악보다 미술을 먼저 만나게 된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아닌 공공장소에 미술작품 전시 운동을 벌이고 있는 빈의 민간기구 MIP(Museum in Progress)와 협업해 1998년부터 매 시즌 무대막을 현대미술 작품으로 걸고 있는 것. 전통의 오페라극장을 매일 잠시나마 거대한 현대미술 전시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20주년을 맞아 20번째 ‘철의 커튼’을 내걸었다. 올시즌 선정작인 미국의 현대미술 거장 존 발데사리의 신작 ‘졸업’(2017)이 공연 직전까지 압도적인 스케일로 눈길을 붙들고 있다(6월 28일까지).

24년만에 공연된 ‘삼손과 데릴라’에서 테너 로베트로 알라냐와 소프라노 엘리나 가란차가 호흡을 맞췄다.

24년만에 공연된 ‘삼손과 데릴라’에서 테너 로베트로 알라냐와 소프라노 엘리나 가란차가 호흡을 맞췄다.

‘삼손과 데릴라’는 빈 슈타츠오퍼가 24년만에 올린 레퍼토리다. 구약성서 스토리에 생상스가 오라토리오에 가깝게 작곡한 고전으로, 빈 슈타츠오퍼에서는 말러가 활약하던 1907년 초연됐다. 이번 공연은 빈 슈타츠오퍼에 데뷔하는 젊은 여성 연출가 알렉산드라 리트케가 매우 미니멀한 무대로 뽑아냈다. 신전 기둥이 뽑히고 다 무너지는 유명한 엔딩을 어떻게 처리할까 싶었지만, 삼손의 정신과 육체를 둘로 나눈 마법같은 불(火) 쇼로 물량공세 못지않은 강렬한 스펙터클을 선사했다. 이국적인 음악으로 유명한 3막의 명장면 ‘바카날’을 비롯해 구약시대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모던한 연출에 대해 리트케는 “생상스가 오페라를 썼을 당시부터 성경은 이국적인 이미지였다. 나는 그런 것보다 이 이야기가 왜 지금도 우리의 흥미를 끄는가, 이 주제가 얼마나 현대적인가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캐스팅은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와 메조 소프라노 엘리나 가란차라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두 사람 모두 ‘삼손과 데릴라’ 출연은 이번이 처음이라 더욱 이목이 집중됐다. 더없이 달콤한 음색의 삼손 로베르토 알라냐를 쥐고 흔드는 드라마틱한 메조 소프라노 엘리나 가란차의 강력한 여성성이 사랑과 믿음, 권력과 욕망에 관한 해묵은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빈 슈타츠오퍼에서 이미 30개 작품을 올린 마에스트로 마르코 아밀리아토가 이끈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는 50인조 규모에도 웅장하기보다 객석에 스며들듯 퍼져나가는 ‘고품격 음향’의 진수를 들려줬다.

파격적인 불쇼와 함께 막이 내리자, 기립박수가 상당히 오래 이어졌다. 중앙계단을 거쳐 로비로 관객들이 쏟아져 내려왔지만, 문을 열고 곧장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멋지게 차려입은 백발의 노부부 커플들이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공연의 여운을 오래도록 만끽하는 모습이 훈훈했다. 오페라의 유령들도 극장 구석구석에서 손님들을 배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빈(오스트리아) 글·사진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Wiener Staatsoper / Michael Poehn·빈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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