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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보수 아닌 반동 한국당, 폐업이 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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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말들이 많다. 보수의 몰락이라고도 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도 한다. 한마디로 다 틀린 말이다. 보수의 몰락은 무슨! 자유한국당이 몰락했을 뿐이다. 새로운 시대도 무슨! 새 시대는 이미 오래전 열려 있었다. 한국당만 몰랐던 거다. 그러니 망하는 게 당연하다. 망해도 싸다.

화전처럼 불 놓아 지력 회복해야 #재가 되려는 이 없으니 재기불능

누구나 예상한 참패였다. 선거 당일 개표 결과를 기다리며 미리 써놓았던 사설에서 몇 자 고칠 것도 없었다. 공란으로 남겨뒀던 최종 투표율만 채웠을 정도였다. 한국당도 예상했을 터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한국당은 시대만 모른 게 아니었다. 자기가 누군지부터 몰랐다. 스스로 보수라 착각한 것이다. 천만에! 대한민국 보수 유권자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당이 자신들을 대표한다고 믿지 않았다. 미국의 정치학자 출신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일찌감치 분류한 정의가 있다. “급진주의자는 너무 멀리 간 사람이고, 보수주의자는 충분히 가지 않은 사람이며, 반동주의자는 아예 가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한국당이 어디 속할지는 분명하다. 반동주의자 말고는 없다.

자기 당 출신 대통령 두 명이 구속돼도 어느 누구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눈꼴시게 맹종하던 친이, 친박 모두 그랬다. 입으론 사죄를 외치면서 몸은 기득권을 깔고 앉았다. 반성이 없으니 개혁도 없었다. 국가의 미래는 안중에 없고 자신의 미래만이 관심이었다. 초선의원들부터 그랬다. 행여 눈 밖에 나 차기 공천을 못 받을까 스스로 청맹과니가 됐다. 중진이나 원로들도 쓴소리를 아꼈다. 대신 안으로 다투고 밖으로 발목잡기에 바빴다. 절망적인 청년실업과, 도를 넘는 양극화, 무너진 계층 사다리에 미래 없는 청년들이 제 나라를 ‘헬 조선’ ‘망한민국’으로 부를 지경인데도, 대안 제시는커녕 관심조차 없었다. ‘재벌 중심의 성장정책’이라는 흘러간 옛노래만 주야장천 불러댔다.

그러면서 보수 유권자들의 표를 기대한 몰염치가 가증스럽다. 보수 유권자들이 반동 정당을 찍을 이유가 어디 있겠나. 결과는 뻔했다. 이후 태도는 더욱 가관이다. 사죄 퍼포먼스가 또 한 번 등장했지만 욕만 먹고 말았다. 초선의원 몇 명이 중진 책임을 외쳤지만 웃음거리가 됐다. 초선보다 차라리 중진들이 더 소장파다웠던 게 한국당 현실이었다. 막말로 폭망에 일조한 당 대표는 물러나면서 마지막 막말을 했다. 지금까지의 막말 중 가장 점잖고 옳은 말이었지만 버스 떠난 뒤의 한탄이었다. 여전히 책임은 지는 게 아니라 떠넘기는 게 됐다. ‘한국당 완패를 이끈 5대 공신’ 명단이 돌고 있다. 그중 5등 공신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한국당 국회의원 전원’ 말이다.

한국당은 문을 닫는 게 옳다. 그게 유권자들의 표심이다. 어영부영 시늉으로 될 일이 아니다. 척박한 땅에서는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지 않는다. 완전히 갈아엎고 불을 놓아야 한다. 야초와 잡목을 태워 지력을 회복하는 화전(火田) 말고는 방법이 없다. 유권자들이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스스로 불에 타 재가 쌓여야 한다. 정치는 감동이다. 그런 감동이 없으면 결코 싹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너도나도 불을 놓겠다고 덤벼들기만 하지, 스스로 재가 되겠다는 인물이 없을 테니 하는 얘기다.

황무지에서도 웰빙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며 여당이 실수하기만 기다릴 게 뻔하다. 불행히도 승리에 도취한 여당도 그런 실수를 저지를 공산이 크다. 대통령 한 사람의 힘으로 거둔 승리인데도 그걸 모르니 그렇다. 벌써부터 2020년 총선 압승이라는 섣부른 얘기가 나온다. 한국 정치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