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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더 가고 자동차 男만큼 사고…이젠 '쉬코노미'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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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 정보기술(IT) 기업에서 근무하는 이지은(38) 씨는 최근 ‘모녀여행 패키지’로 태국 여행을 다녀왔다. 어머니의 체력을 고려해 동선은 짧고, 스파ㆍ마사지에 집중된 여행일정을 찾다 발견한 상품이다. 이 씨는 “여성들의 취향에 맞는 여행계획이 맘에 들어 보자마자 바로 결제했다”며 “여행을 다녀온 어머니도 만족도가 높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유명 연예인 제시카 알바가 설립한 ‘디 어니스트 컴퍼니’는 자녀를 둔 여성들에게 주목받는 기업이다. 이 회사는 아기와 엄마가 마음 편히 사용할 수 있도록 파라벤 등 유해성분을 뺀 비누ㆍ세제ㆍ화장품을 판매한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품을 직접 사용하는 여성 소비자들의 입장을 반영해 제품 성분을 투명하게 제공한다”라고 강조했다.

여성이 소비 시장의 주체로 떠오르면서 ‘쉬코노미’ 바람이 거세다. 쉬코노미는 ‘그녀(She)’와 ‘이코노미(Economy)’의 합성어다. 과거에는 패션ㆍ화장품 등 일부 분야에서만 여성 소비파워가 강했지만, 최근에는 그 분야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한 여행사가 내놓은 '모녀 여행' 상품(왼쪽부터), 주류 브랜드 조니 워커가 여성 애주가를 위해 내놓은 위스키 '제인 워커, 페미니스트 어젠다를 드러낸 디오르의 티셔츠.[사진: 각 사]

국내 한 여행사가 내놓은 '모녀 여행' 상품(왼쪽부터), 주류 브랜드 조니 워커가 여성 애주가를 위해 내놓은 위스키 '제인 워커, 페미니스트 어젠다를 드러낸 디오르의 티셔츠.[사진: 각 사]

최근 국내 시장에서 이런 쉬코노미가 두드러지고 있는 곳은 여행업계다. 한국여행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로 출국한 여성은 1245만 명으로 남성(1238만 명)을 처음으로 앞질렀다. 특히 20대 출국자 462만 명 가운데 여성은 279만 명으로 전체의 60%를 넘었다. 이처럼 여행을 즐기는 여성이 늘면서 주요 여행사ㆍ호텔은 앞다퉈 ‘모녀 여행’을 테마로 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

조일상 하나투어 홍보팀장은 “가족여행을 결정하는 주도권이 보통 여성에게 있기 때문에 가족용 패키지에도 카페에서의 자유시간을 추가하는 등 여성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프로스포츠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남자프로배구의 여성 관중은 전체의 68%에 이른다. 지난해 역대 최다 관중인 840만 명을 기록한 프로야구의 경우 여성 관중 비율이 42%를 넘어섰다. SK와이번스는 매주 금요일을 ‘레이디스 데이’로 지정해 여성 대상 이벤트를 진행하고, 두산베어스는 한 달에 한 번 ‘퀸즈 데이’를 정해 여성 팬을 대상으로 입장권을 할인해주고 있다.

자동차와 게임 시장에도 쉬코노미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자동차 렌탈 서비스 이용자의 44%는 여성이었고(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분석), 게임을 즐기는 여성 비율은 지난해 기준 65.5%로 남성(75%)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한국콘텐츠진흥원)

이는 여성이 독립적인 경제주체의 지위를 확보하면서 자신을 위한 소비를 점점 늘리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여성 근로자의 월평균 급여는 194만6000원으로 2008년(141만3000원)보다 37.7% 늘었다. 여성 1인 청년 가구(25~39세) 월평균 소비지출은 125만원으로 남성(110만원)보다 씀씀이가 크다.

김시월 건국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소비자 선택의 참고자료로 이용되고 있다”며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타인과 정보 교환을 하는 여성들의 전파력이 강해진 점도 한몫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쉬코노미의 진원지인 미국 소비시장에서는 ‘여풍’이 몰아친 지 오래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미국의 여성 소비자들은 전체 구매 결정의 85%를 담당하고 있다. 개인적인 소비뿐 아니라 가족이 함께 쓰는 자동차ㆍ가전ㆍ식료품에 대한 소비 결정을 여성이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 근로자의 수입이 남성의 80%가 넘을 정도로 경제력이 커진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이에 기업들은 발 빠르게 여성의 시각에서 물건을 만들고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써드러브’는 기존 브래지어 컵 사이즈인 AAㆍAㆍBㆍCㆍD 사이즈 등에 ‘B1/2’ㆍ‘C1/2’ 등의 사이즈를 추가해 다양한 신체 사이즈의 여성들을 만족하게 하고 있다. 200년 역사를 가진 주류 브랜드 ‘조니 워커’는 사상 처음으로 여성 애주가를 겨냥한 ‘제인 워커’ 위스키를 미국 시장에 선보였다.

전통적으로 남성 브랜드로 인식되던 스포츠웨어 브랜드 ‘언더 아머’, 맥주 브랜드 ‘쿠어스 라이트’ 등은 이제 여성 모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임신ㆍ출산을 계획적으로 할 수 있게 돕는 ‘프릴류드’, 월경일 빅데이터 분석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 등 여성을 위한 이른바 ‘펨테크’(FemTech) 스타트업들도 눈에 띈다.

전문가들은 여성의 가치관 변화가 소비 행태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들어 아름다움이나 여성성보다는 자신의 만족감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소비가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시장조사업체 NPD그룹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용 스니커즈 판매량이 37% 증가했지만, 하이힐 매출은 11% 감소했다. 속옷업계에선 가슴을 옥죄던 브래지어 패드와 와이어를 없앤 ‘와이어리스 브라’가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 유니클로 관계자는 “많은 여성이 볼륨감이 아닌 편안함을 속옷 선택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인기 색상은 동난 상태”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고급 의류 브랜드 디오르에서는 ‘We Should All Be Feminists’(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라는 문구가 찍힌 티셔츠를 선보이며 페미니스트 어젠다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부 활동가와 학자의 영역에 머무르던 페미니즘이 시민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일각에서는 여성성의 상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여성을 내세우는 마케팅이 자칫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여성을 위한다’는 본질도 변질ㆍ퇴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최근 페미니즘이 이슈가 되자 기업이 단기적으로 매출을 늘리기 위해 페미니즘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며 “여성을 ‘가치’가 아닌 ‘수익’ 차원에서 접근했다가는 장기적으로 기업 이미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여심을 잡기 위한 마케팅이 역효과를 불러오는 경우도 있다. 올 초 미국의 펩시코는 ‘레이디 도리토스’를 만들겠다고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핸드백에 휴대하기 쉬우며 공공장소에서도 씹는 소리가 나지 않고, 손에 양념이 잘 안 묻는 과자로 소개됐다. 하지만 이는 여성들은 과자를 조용하고 깨끗하게 먹어야 한다’는 편견이 암시돼 있다는 반발을 불러왔다.

강채린 KOTRA 로스앤젤레스 무역관은 ”여성에 관한 잘못된 성 편견을 마케팅에 이용하는 것은 금물”이라며 “여성용 제품이라는 이유로 가격이 비싼 것을 ‘핑크 택스’라고 하는데, 기능상 큰 차이가 없으나 디자인ㆍ색상만 바꾸어 ‘여성용’으로 판매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크다”라고 조언했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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