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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가 놀다 하늘로 올라간 곳, 설악산 서북능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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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하만윤의 산 100배 즐기기(24) 

귀때기청봉에서 마주한 일출. [사진 하만윤]

귀때기청봉에서 마주한 일출. [사진 하만윤]

5월의 끝자락에 설악산 서북능선을 찾았다. 공룡능선을 다녀온 것이 지난해 이맘때였으니 딱 1년 만에 다시 설악으로 향했다. 서북능선은 거리와 난이도 면에서 어렵고 힘들기로 정평이 난 설악산 코스 중 하나다. 서북 주능선코스는 장수대에서 대승폭포, 대승령으로 올라 귀때기청봉, 한계령 삼거리를 지나 대청봉까지 가는 것이다.

이중 한계령에서 올라 한계령 삼거리에서 대청봉으로 가는 것을 서북능선코스, 반대로 장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을 서쪽능선코스라고 한다. 공룡능선이 설악산을 내설악과 외설악으로 나눈다면, 서북능선은 내설악과 남설악으로 구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산행은 코스를 둘로 나눠 진행키로 했다. 서쪽능선인 장수대로 하산하는 코스와 대승령에서 십이선녀탕을 지나 남교리로 내려오는 코스. 전자보다 후자가 좀 더 길고 힘이 든다. 출발을 함께 하되 대승령에 도착해 산행참가자 스스로 자신의 체력 등을 꼼꼼히 따져 코스를 결정키로 했다.

설악산까지 거리가 있는 만큼 무박 산행으로 진행한다. 오랜만에 금요일 밤에 출발해 토요일 새벽부터 산행을 시작하는지라 조금은 긴장이 된다.

캄캄한 새벽, 한계령삼거리를 향해 첫발을 내딛는다. [사진 하만윤]

캄캄한 새벽, 한계령삼거리를 향해 첫발을 내딛는다. [사진 하만윤]

새벽 3시. 한계령휴게소에 도착한 일행은 분주히 산행을 준비한다. 스틱을 펴 자신의 키에 맞게 길이를 조절하고 등산화 끈을 다시 묶으며 랜턴 불을 밝힌다. 곧이어 한계령 대피소 앞에서 다른 산악회 일행과 섞이지 않게 일렬로 서서 설악산으로 첫발을 내디딘다. 나는 일행 전체 인원 43명이 입장한 것을 확인하고 맨 뒤에서 마지막으로 입장한다.

초반 오르막길에서 낙오자 생겨

서북능선코스는 초반 오르막길이 만만치 않다. 능선까지 오르는 2시간가량이 대부분 오르막길이라 페이스 조절이 정말 중요하다. 실제로 이번 산행에서 일행 중 한 명이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통을 호소하며 걷다 쉬다를 반복했고, 결국은 스스로 하산을 결정하고 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일이 발생했다.

평소 산행 중에도 자신의 몸 상태를 면밀히 살피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주위 시선을 의식하며 무리하다 보면 건강을 해치기 십상이다. 힘들면 쉬어야 하고 도저히 무리겠다 싶으면 산행을 그만두고 되돌아 내려갈 수 있는 결단도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산을 오래도록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한계령삼거리에 이르자 동이 트기 시작한다. [사진 하만윤]

한계령삼거리에 이르자 동이 트기 시작한다. [사진 하만윤]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으로 일행 한 명을 돌려보내고 다른 일행과 벌어진 거리를 좁히기 위해 조금 속도를 내 걷는다. 캄캄한 산길을 랜턴 불빛에 의지해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한계령 삼거리에 도달한다. 그제야 저 멀리 동이 터온다. 먼저 도착해 여명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일행을 만나 귀때기청봉 방향인 왼쪽으로 길을 나선다. 다른 산악회들은 대청봉을 향해갔는지, 귀때기청봉 방향으로 가는 이는 우리밖에 없다.

귀때기청봉에는 재밌는 설화가 있다. 설악산 대청봉과 중청봉, 소청봉에게 자신이 제일 높다고 으스대다가 귀싸대기를 맞아 귀때기청봉으로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다. 그 설화만큼이나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귀때기청봉으로 오르는 길은 전부 너덜이다. 그것도 작은 돌이 아니라 큰 돌들이 고르게 흩어져 깔려있다. 너덜 길 초입에 다다르자 멀리 동해에서 해가 떠오르는 게 보인다.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넋을 놓는다. 자연의 위대한 일상이 주는 선물이다.

귀때기청봉에서 해돋이에 넋 잃어 

떠오르는 해를 머금은 귀때기청봉 너덜 길. [사진 하만윤]

떠오르는 해를 머금은 귀때기청봉 너덜 길. [사진 하만윤]

그렇게 귀때기청봉에서 해돋이에 넋을 놓던 일행은 그 힘으로 단숨에 정상까지 오른다. 겨우내 산불방지 기간으로 출입이 금지돼 있던 설악은 오월 봄을 머금어 온통 초록빛이다. 가야 할 길이 멀기에 정상에서 간단히 이른 아침을 먹고 다시 난이도 상급의 귀때기청봉에서 대승령까지 약 5km 구간을 행해 길을 나선다. 저 멀리 오르내려야 할 길이 보이고 곳곳에 계단을 설치한 곳도 보인다.

귀때기청봉에서 대승령으로 향하는 시작 구간. 아직은 일행의 표정이 밝다. [사진 하만윤]

귀때기청봉에서 대승령으로 향하는 시작 구간. 아직은 일행의 표정이 밝다. [사진 하만윤]

아주 오래전, 설악의 이 코스를 처음 오를 때가 문득 떠오른다. 그때는 날이 흐려 어디를 둘러봐도 모호했다. 안개인 듯 구름인 듯 길 전체를 감싼 기운에 떠밀려 걸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이번에 맑고 깨끗한 햇빛 아래 능선의 좌우가 선명한 것이 생경하고도 반갑다. 능선 오른쪽에는 봉정암-영시암-백담사로 이어지는 계곡이 흐를 것이고, 왼쪽으로는 가리봉-주걱봉-삼형제봉이 나란히 서 있을 것이다. 이런 풍경을 머릿속에 상상하듯 떠올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즐겁다.

대승령 가는 길에 마주한 풍경. 장엄한 바위며 첩첩이 쌓인 산이 영화 [아바타] 속 풍경에 비견하다. [사진 하만윤]

대승령 가는 길에 마주한 풍경. 장엄한 바위며 첩첩이 쌓인 산이 영화 [아바타] 속 풍경에 비견하다. [사진 하만윤]

5Km 남짓한 길을 3시간 넘게 걸으니 드디어 작은 평지가 나타난다. 대승령이다. 해발 1210m 고개장수대분소에서 대승폭포를 거쳐 오르면 4개의 등산로가 만나는 길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백담계곡, 왼쪽으로 남교리, 오른쪽으로 대청봉으로 가는 여정이 나뉘게 된다.

4개의 등산로가 만나는 지점, 대승령. [사진 하만윤]

4개의 등산로가 만나는 지점, 대승령. [사진 하만윤]

새벽부터 시작한 산행은 어쩌면 자신과 싸워 이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어둠을 헤치며 허기와 싸우고 졸음을 쫓으며 오르는 길은 지독하게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다. 후미를 챙기느라 대승령에 늦게 도착했더니 먼저 도착한 일행은 벌써 점심은 끝내는 중이다. 필자는 서둘러 등산화를 벗고 발의 열을 식히며 준비한 점심을 먹는다.

애초에 계획한 대로 일행은 각자 컨디션을 스스로 체크해 대승령으로 하산할 이들과 십이선녀탕을 지나 남교리 방향으로 하산할 이들로 갈랐다. 상대적으로 짧은 코스로 하산할 이들은 좀 더 쉬고 나머지 일행은 서둘러 길을 나선다. 긴 코스를 선택한 이들은 대승령에서 보이는 안산 중턱을 돌아 넘어가야 한다.

서북능선의 서쪽 끝인 안산은 찾는 이들이 많지는 않되, 대승령에서 십이선녀탕계곡으로 하산 길을 잡으면 이 산을 스쳐 지나는 것이 보통이다. 봉우리를 오르진 않지만 중턱을 돌아 넘어가는 길이라 식사 후 바로 걷기가 결코 쉽지는 않다. 그래도 이 중턱만 오르면 이후 8km 남짓한 길은 십이선녀탕계곡을 따라 하산하면 된다.

십이선녀탕계곡의 백미, 복숭아탕. [사진 하만윤]

십이선녀탕계곡의 백미, 복숭아탕. [사진 하만윤]

십이선녀탕계곡은 폭포수가 바위를 파내며 만든 탕이 많다고 해 예전에 탕수동계곡으로 불렸다. 실제로 계곡을 따라가면 오랜 세월 하상작용을 받아 넓고 깊은 구멍이 있는 신기한 모양의 탕과 폭포가 줄줄이 이어진다. 예전에 호우로 등산로가 망가졌을 때 대대적으로 재정비하면서 물줄기를 건너는 곳마다 구름다리를 놓았고 하천의 바닥 가까이 지나야 하는 구간에도 그 위에 목재 데크를 설치해 걷기가 한결 편해졌다.

십이선녀탕아닌 팔선녀탕…최고 볼거리는 복숭아탕

또 목재 데크에 잠시 머물며 탕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십이선녀탕계곡에는 예부터 12탕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8탕밖에 없다. 웅봉 아래 웅봉폭포를 지나면 첫 탕인 독탕이 나오고 북탕, 무지개탕, 복숭아탕을 지나 맨 마지막에 용탕이 나온다. 이 중 최고의 볼거리는 복숭아탕이다.

폭포 아래 복숭아를 그대로 옮겨 파놓은 듯한 깊은 구멍에 비치색 물빛이 오묘하고도 신비롭다. 십이선녀탕계곡에는 밤이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동이 트기 전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문득 선녀들은 이처럼 황홀한 풍경을 두고 어찌 하늘로 올라갔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복숭아탕이 내려다보이는 데크에서의 꿀잠. [사진 하만윤]

복숭아탕이 내려다보이는 데크에서의 꿀잠. [사진 하만윤]

후미와 제법 거리가 벌어진 일행은 복숭아탕이 바라보이는 데크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다.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와 계곡 사이를 지나는 기분 좋은 바람에 깜박 잠이 들었다 깼는데 밤을 새우며 걸은 피곤이 한순간 사라진 느낌이다. 잠시 잠깐 그야말로 꿀잠이다.

후미까지 합친 일행은 남은 하산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으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대승령으로 먼저 하산한 일행이 반겨주는 함성과 밝은 표정들을 보니 그제야 안도감이 든다. 또 이렇게 하나의 산행 추억을 남기게 됐다는 기쁨에 마음이 절로 흐뭇하다.

한계령휴게소-한계령삼거리-귀때기청봉-1408봉-대승령-안산-십이선녀탕계곡-남교리 십이선녀매표소. [사진 하만윤]

한계령휴게소-한계령삼거리-귀때기청봉-1408봉-대승령-안산-십이선녀탕계곡-남교리 십이선녀매표소. [사진 하만윤]

총거리 약 18Km, 총 시간 약 13시간. [사진 하만윤]

총거리 약 18Km, 총 시간 약 13시간. [사진 하만윤]

하만윤 7080산처럼 산행대장 roadinm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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