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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법정드라마, 위엄을 벗고 생활을 입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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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여느 법정 드라마와 달리 ‘미스 함무라비’는 판사와 법원 직원들이 고르게 등장한다. [사진 각 방송사]

여느 법정 드라마와 달리 ‘미스 함무라비’는 판사와 법원 직원들이 고르게 등장한다. [사진 각 방송사]

요즘 TV를 틀면 일주일 내내 법정이 등장한다. 월화엔 MBC ‘검법남녀’와 JTBC ‘미스 함무라비’가 나오고, 수목엔 KBS2 ‘슈츠’, 주말엔 tvN ‘무법변호사’로 이어지는 식이다. SBS 역시 다음 수목극으로 ‘친애하는 판사님께’를 준비 중이다. 각각 형사와 검사가 주인공이었던 ‘시그널’(2016), ‘비밀의 숲’(2017) 등이 잇따라 인기를 끌면서 장르물 제작을 꺼려온 방송사들도 앞다퉈 법정 드라마 제작에 뛰어든 것이다.

‘미스 함무라비’‘검법남녀’‘슈츠’ 등 #채널 돌릴 때마다 재판 장면 나와 #성희롱·상속 등 일상 이슈에 초점 #한국 사회 다양한 이해충돌 다뤄 #‘법은 권력자의 것’ 선입견 무너져

검사와 법의관이 콤비를 이루는 ‘검법남녀’. [사진 각 방송사]

검사와 법의관이 콤비를 이루는 ‘검법남녀’. [사진 각 방송사]

이들 드라마는 먼저 직업으로 차별화를 꾀한다. ‘검법남녀’는 사진을 찍듯 탁월한 기억력을 지닌 초임 검사(정유미)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소속 법의관(정재영)이 주인공이다. 검사라면 경찰처럼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 단골손님. 하지만 시신을 부검하는 법의관은 색다르다. “수사관이자 장의업자인 동시에 백정이며 외과의사”라는 정재영의 대사처럼 ‘모든 시신은 단서를 남긴다’는 전제 하에 시체를 쩍쩍 가르는 모습 등 TV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까지 보여준다.

판사도 마찬가지. 경찰과 검찰이 사건 현장을 누비며 스펙타클한 비주얼을 만들어내는 반면 판사는 기록을 검토하고 양측의 의견을 듣고 종합해 판단하는 일이다. 주 생활반경이 법원이다 보니 시각적 효과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난해 ‘이판사판’ 이전까지만 해도 드라마 전면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미스 함무라비’는 박차오름(고아라)·임바른(김명수)·한세상(성동일) 등 민사 합의부 판사 세 명을 과감하게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앉아 조용히 기록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기록 속의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활자로 못다 옮긴 진짜 삶을 들여다보면서 드라마에 역동성을 불어넣는다. 캐릭터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들은 그저 근엄하게 내려다보는 법관이 아니라 자주 흥분하고 소리치고 행동하는 인간이다.  ‘검법남녀’의 초임 검사 은솔에게 붙은 “오지라퍼이자 감수성 과다이면서 또라이 기질을 가진 신참”이란 수식어는 ‘미스 함무라비’의 초임 판사 박차오름에게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조폭 출신 변호사가주축이 된 ‘무법변호사’. [사진 각 방송사]

조폭 출신 변호사가주축이 된 ‘무법변호사’. [사진 각 방송사]

변호사 역시 기존에 알고 있던 모습과는 거리를 둔다. ‘무법변호사’의 변호사 주인공(이준기)은 조폭 출신이다. 누구보다 어둠의 세계를 잘 알기에 이를 활용해 법망을 빠져나가기도 하고, 상대가 법망에 포획될 수 있도록 연막을 치기도 한다. 그의 언행 자체가 ‘합법성’보다는 합목적성에 부합하는 것이다. ‘슈츠’는  2011년 미국 USA 네트워크에서 방영된 드라마가 원작이긴 하지만, 자격증 없는 가짜 변호사 박형식이 대형 로펌에 입성하는 설정 자체가 대한민국의 흙수저 담론과 궤를 같이한다. 그간 엘리트의 전당으로 여겨진 법정 구성원의 눈높이를 우리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에 맞춰 조정한 셈이다.

이들 드라마는 전문성에 갇혀있던 직업의 세계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카메라 앵글 안에는 더 많은 단면을 포착해내고 있다. 특히 ‘미스 함무라비’는 판사뿐 아니라 재판을 기록하는 속기사, 법정을 지키는 법원보안관리대원 등 다양한 직군이 등장해 묘사의 생생함을 더한다. 고깃집에서 불판에 데인 아이 때문에 찾아온 엄마, 부장의 카톡 성희롱을 견딜 수 없는 광고회사 인턴사원 등 생활밀착형 사건을 통해 공감대를 넓힌다. ‘검법남녀’ 역시 살인 등 강력 사건이 아니라 가정폭력·상속분쟁 등 언제 내 얘기가 돼도 이상하지 않을 사건을 통해 몰입도를 높인다.

‘미스 함무라비’는 현직 판사가 직접 쓴극본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년 판사 경험을 농축해 2016년 소설 『미스 함무라비』(문학동네)를 펴낸 문유석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가 드라마 집필까지 맡아 사실성과 대표성을 모두 획득한 것. 원작 소설의 세 배 분량으로 늘어난 대본은 젠더법연구회 회원인 문 판사의 간접경험에 위트도 녹아 있다. 여성 판사인 박차오름이 ‘판사면 판사답게 조신하게 입고 다니라’는 부장판사의 말에 눈을 제외한 몸 전체를 뒤덮은 니캅을 입고 나타나는 식이다.

대사 하나가 5분을 넘길 정도로 드라마스럽지 않은 장면도 있지만 되려 그런 투박함이 진솔하게 다가온다는 평가가 나온다. 제작사 관계자는 “문유석 판사 본인이 세련되지 않은 건 알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놓고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며 “드라마 작법을 따로 배우지 않았으니 문학적 욕심보다는 르포에 가까운 글쓰기인데 우리가 처한 현실과 맞물리는 부분이 많아 실화의 힘이 발휘된 것 같다”고 전했다. 시청률은 5%대인데 각종 화제성 조사에서 1위에 오른 것도 이를 보여준다.

로펌 대표 변호사와 가짜 변호사가 활약하는 ‘슈츠’.

로펌 대표 변호사와 가짜 변호사가 활약하는 ‘슈츠’.

장르물이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질적 성장을 이뤘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아직도 법 하면 많은 사람들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제일 먼저 떠올릴 정도 권력자의 전유물처럼 느끼고 있던 터에 나같은 서민도 법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라서 소구력이 생긴 것”이라며 “장르적 재미뿐 아니라 실제 경험과 취재를 통해서만 나올 수 있는 디테일을 즐기는 시청자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미스 함무라비’는 박차오름 판사의 성장기인 동시에 현재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젊은 여성의 성장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슈츠’ 역시 가짜 변호사 박형식의 성장기 같지만 이를 반추해 진짜 변호사 장동건이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라며 “법정 드라마 같은 장르물이 성장 드라마의 역할까지 병행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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