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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엘리엇이 던진 숙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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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주주 행동주의라는 영리한 작명 뒤에 숨었지만 엘리엇의 본색은 기업 사냥꾼이다. 기업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최대한 뜯어먹는 게 업이다. 크고 통통한데 약점 있는 기업을 특히 좋아한다. 삼성에 이어 현대차를 고른 이유도 뻔하다. 수십조원의 현금을 갖고 있고, 기업 지배구조를 바꿔야 하며, 3세 승계란 관문을 넘어야 한다. 더 좋은 먹잇감이 있을 수 없다. 엘리엇은 삼성 학습효과를 통해 새끼 밴 짐승처럼 한국 기업이 승계 이슈 땐 더 취약해진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주주 행동주의자의 탐욕 #어디까지 채워줘야 하나

결국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은 일단 없던 일이 됐다. 정의선 부회장은 “더 주주 친화적인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현대차가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해졌다는 뜻이다. 그중 상당액은 엘리엇에 갈 수도 있다. 원래는 세금을 내거나 투자하거나 고용을 늘리거나 임금을 올려주는 데 쓰일 돈이었다.

그렇다고 엘리엇의 탐욕만 탓할 일도 아니다. 칼 아이컨, 빌 애크먼, 데이비드 아인혼은 더하다. 아이컨의 협박에 애플은 2년간 2000억 달러를 들여 자사주를 사고 배당을 했다. 델·야후·JC페니·GM·휼렛패커드도 당했다. 이들 행동주의 펀드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2005년부터 2015까지 10년간 미국 기업이 자사주 매입 등에 쓴 돈은 7조 달러나 됐다. 애플은 올 1분기에도 228억 달러어치의 자사주를 샀다. 사상 최대다. 이들은 미국을 넘어 아시아를 넘보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의 아시아 진출은 최근 6년 새 10배 넘게 늘었다. 엘리엇의 연이은 탐욕은 그간 일회성이던 행동주의자들의 한국 기업 사냥이 상시화됐다는 신호탄일 수 있다.

엘리엇에 손 놓고 또 당할 수는 없다. 그러려면 해야 할 숙제가 많다. 당장 급한 건 세 가지다. 첫째, 한국 재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정부만 ‘오케이’면 그만인 식의 승계 작업이나 지배구조 개편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현대차 개편안에 대해 애초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긍정적”이라고 치켜세웠다. 엘리엇의 요구에 대해서도 김상조는 “금산분리를 고려하지 않은 제안”이라며 현대차 편을 들었다. 현대차가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회사인 ISS의 ‘반대 권고’를 일축한 데는 김상조와의 ‘교감’이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정부-현대차의 브로맨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둘째,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됐다. 기관투자가가 기업을 집사처럼 돌보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그것이다. 1980~90년대 기업 사냥꾼들이 극성을 부리자 이에 대항해 만들어진 게 스튜어드십 코드다. 기업을 늘 모니터링하고 기업과 함께 대안을 찾는 게 집사의 일이다. 국민연금은 4대 그룹 지분을 6~9% 갖고 있다. 주요 안건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도 평소엔 나 몰라라 하다 곤란한 사안이 생기면 외부 인사로 구성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 결정을 떠넘긴다. 그야말로 무책임의 극치요, 청산해야 할 적폐다. 대신 전제가 있다. 집사의 정치색은 완전히 빼야 한다. 아니면 행동주의 펀드에 휘둘리는 것만도 못한 결과를 낳게 된다.

셋째, 우리도 의결권 자문회사를 제대로 키울 때가 됐다. 국내엔 3곳이 활동 중이지만 영문 보고서 하나 못 낸다. 그러니 외국인 투자자들이 ISS에 의존하게 된다. ISS의 주인은 사모펀드다. 서스틴베스트 류영재 대표는 “한국 기업 900~1000곳을 ISS 직원 두 명이 담당한다. 정밀한 자문이 어려운 인력 구조”라고 했다. 그런 자문에 한국 기업들이 언제까지 휘둘리게 놔둘 건가. 숙제 하나하나가 쉽지 않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