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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상연의 시시각각

포퓰리즘 단일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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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이탈리아를 자동차로 여행한 적이 있는데 거친 운전 문화에 깜짝 놀랐다. 교행이 힘든 시골의 비포장 단선로에서도 전속력으로 마주 달려오는 차량을 보며 기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제오늘의 일만도 아닌 모양이어서 걸어가는 사람을 개의치 않고 질주하는 마차에 혀를 내둘렀다는 영국인의 중세시대 이탈리아 여행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최악 이탈리아 닮아가는 선거판 #한국병은 누가 수술대에 올리나

‘선진국 답지 않은 교통 문화가 인상적’이란 얘기를 했더니 정작 이탈리아 사람들은 시큰둥했다. 오히려 ‘자동차 사고가 나면 이탈리아에선 접촉 사고 정도지만 독일에선 사망 사고’라며 빙그레 웃었다. 이탈리아선 교통 법규를 누구도 지키지 않을 거란 염려 탓에 모두 방어운전을 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독일에선 누구든 법을 지킬 거라고 믿기 때문에 내 할 일만 신경 쓴다는 것이다.

물론 웃자는 말인데 생각해 보면 나름의 일리가 있다. 특히 정치가 그렇다. 다른 사람 입맛에만 맞추다 보니 이탈리아 정치는 옳은 말보다 무조건 듣기 좋은 말뿐이다. 얼마 전 총선이 그랬다. 압승을 거둔 승자는 포퓰리즘 정당들이다. 기존의 중도 우파, 중도 좌파 정당들은 지지 기반을 잃었다.

주 20시간 근로시간 단축 등을 내걸고 만들어진 좌파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은 이번엔 모든 국민에게 월 780유로(약 100만원)의 기본소득을 약속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끄는 우파 전진이탈리아당도 다르지 않다. 부자에겐 상속세 폐지, 가난한 사람에겐 세금 전액 면제로 다가갔다. 이젠 이들의 연정 합의로 서유럽 최초의 포퓰리즘 정권 탄생이 초읽기다.

문제는 하루가 다르게 우리 정치가 그런 이탈리아 정치를 닮아간다는 점이다. 우선 선거판 복지 경쟁이 과거와는 양상이 달라졌다. 4년 전만 해도 초·중학교 무상급식을 놓고 보수와 진보는 입장이 갈렸다. 하지만 이번엔 진영도 없다. 모든 후보가 ‘고교 무상급식’ 이슈를 들고 나왔다. 4조원이 필요하다지만 곳간을 걱정하는 후보는 없다. ‘무상 교복’ ‘무상 교과서’ ‘등하교 교통비 지원’도 있다. ‘청년배당’ ‘주부수당’ ‘아동수당 플러스’ 공약에도 찬반이 없다.

정치판 포퓰리즘은 선거 때마다 도지는 불치병이라고 치부할 일만이 아니다. 얼마 전 방한한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정치 지도자는 직책을 잃을 위험을 감내하고라도 국익을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민당 당수 출신의 좌파 정치인이지만 우파적 개혁으로 독일병을 고쳤다. 그렇게 내 할 일을 하곤 선거에 져 정권을 내놨다. 하지만 그게 요즘 독일 신문에 ‘불쌍한 이탈리아’란 사설을 만든 보약이 됐다.

같은 시기 베를루스코니가 이끈 이탈리아는 정반대로 갔다. 일 안 하고 잘살 수 있다는 허풍으로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총리를 3선 했다. 또 임기를 모두 채운 유일한 총리였다. 그러나 갈 수 없는 꿈길이다 보니 사사건건 이중 기준에 부패로 얼룩졌다. 서로가 서로를 못 믿었다. 내 할 일엔 모르쇠여서 의회는 이해관계가 걸린 법안일수록 책임을 떠넘기기에만 익숙했다. 그러다 ‘세계 최악의 국회’가 됐다.

도무지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대한민국 국회다. 무엇보다 자기 특권엔 귀신이라는 점이 닮았다. 엊그제는 염동열·홍문종 의원 체포동의안을 부결시켰다. 뒤에서 서로 감싸주는 이탈리아식 이중 기준이 정권을 잃는 독일식 대형 교통사고를 막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공공부채 이자만 매년 100조원이란 쪽박을 만들었다.

가뜩이나 펑펑 써대는 정부인데 거기에다 선거판은 포퓰리즘으로 단일화됐다. 깊어가는 한국병을 수술대에 올릴 슈뢰더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것인가.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