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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日사회…정부선 문서조작ㆍ은폐 판치는데,신문사는 보도자료 분실에 대문짝 사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본사기자 보도자료 분실,외무성에 사죄’
일본 요미우리 신문 23일자 사회 2면에 실린 2단분량 기사의 제목이다.

일본 국회에 나란히 출석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오노데라 이쓰노리 방위상의 모습. 아베 내각에선 방위성 문서와 관련된 은폐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EPA=연합뉴스]

일본 국회에 나란히 출석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오노데라 이쓰노리 방위상의 모습. 아베 내각에선 방위성 문서와 관련된 은폐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EPA=연합뉴스]

요약하면 일본 외무성이 기자들에게 나눠준 보도자료를 요미우리 신문 정치부 기자가 비행기에 놓고 내려 회사 차원에서 외무성에 사죄를 했다는 내용이다.

요미우리 "본사 기자가 보도자료 분실,징계할 것" #한일중 정상회의 관련 자료 비행기에 놓고 내려 #일반인 못 보고, 별 내용 없는데도 외무성에 사죄 #아베 정권 재무성ㆍ방위성은 연거퍼 조작ㆍ은폐 #관료만 책임지고 정치인 출신 장관은 책임 면해 #"메뉴얼ㆍ원칙 좋지만 숲 못 보고 나무만 볼 수도"

비행기에 놓고 내린 자료는 지난 9일 도쿄에서 열린 한ㆍ일ㆍ중 정상회의 관련 자료다.
요미우리는 “7일 외무성이 배포한 자료엔 정상들의 중요 일정 등이 기재돼 있었는데, 기자가 홋카이도에서 열리는 관련 행사 취재를 위해 10일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홋카이도 신치토세 공항까지 탑승했던 항공기안에 놓고 내렸다”고 설명했다.

비행기 좌석 앞 주머니에서 자료를 발견한 항공사 직원이 보관했다고 한다.

요미우리 신문은 그룹 본사 홍보부를 통해 “보도자료를 두고 내렸고 회수 노력까지 게을리한 것은 중대한 기자 윤리위반이라고 인식, 매우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관계자 여러분에게 깊이 사죄드린다. 기자를 징계하겠으며, 향후 취재 자료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하겠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중앙일보가 당시의 보도자료 내용을 파악해보니 자료엔 '복사 금지'등의 문구가 적혀있었지만, 사실 내용 자체는 ‘기밀 수준’이 아니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리커창 중국 총리가 참석하는 각종 행사의 시간과 장소, 리 총리가 삿포로 방문(10~11일)을 위해 이용하는 특별기의 출발ㆍ도착 시간 정도가 포함됐다.

23일자 요미우리 신문 30면(사회 2면)에 실린 사과 기사. [사진 요미우리 신문 캡쳐]

23일자 요미우리 신문 30면(사회 2면)에 실린 사과 기사. [사진 요미우리 신문 캡쳐]

10일 삿포로행 비행기에 놓고 내렸다면 그 시간 이후에 남아 있는 정상들의 행사는 별로 없었고, 특히 항공사 직원이 곧바로 회수했기 때문에 일반인에게 자료가 노출될 위험도 결과적으로 없었다.

하지만 요미우리 신문사는 자사의 중요한 지면을 통해 큼지막하게 사과문을 발표했다.

보도자료 분실에 회사 차원의 사과문 발표라니, 한국 사회에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메뉴얼과 원칙 준수에 철저하다는 일본 사회에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과거의 일본 사회라면 이런 '철저한 문서 관리'문화를 부러워해야겠지만, 최근 연달아 터지고 있는 각종 정부 문서 관련 사고들과의 경중을 따져볼 때 오히려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학재단 모리토모(森友)학원에 대한 국유지 헐값 매각 의혹과 관련, 재무성이 정부 문서 14개에서 300곳 이상을 조작한 것이 이미 확인됐다.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 부부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관여 흔적을 지우고 국회에서 했던 거짓 답변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재무성이 "이미 폐기했다"고 주장했던 모리토모 재단측과의 땅 값 협상 기록중 일부는 컴퓨터에 남아있었다. 남아있던 기록, 또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까 두려워 실제로 폐기했다가 나중에 복원한 자료를 합쳐 950페이지 분량이 23일 국회에 제출됐다.

 일본 정부가 "없다"고 했던 이라크 평화유지군(PKO)활동 관련 일일보고서도 사실은 보관돼 있었다. 자위대가 현지에서 '전투'에 휘말렸을 가능성에 대한 논란을 차단하기 위해 은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밖에 아베 총리가 중점을 두고 추진중인 ‘일하는 방식 개혁'정책의 기초 데이타에서도 노동과 임금 관련 허위 수치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일본 재무성 문서조작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사가와 노부히사 전 재무성 국장.[로이터=연합뉴스]

일본 재무성 문서조작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사가와 노부히사 전 재무성 국장.[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이런 불상사들의 책임은 대부분 관료들이 떠안았다. 각 부처의 최종 책임자인 재무성ㆍ방위성ㆍ후생노동성의 정치인 출신 장관들은 모두 책임을 면제받았다.

이처럼 정부 차원의 문서 조작과 은폐,허위 데이터가 횡행하면서 공문서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한 일본 언론인은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사건들에 비하면 보도자료 분실로 인한 요미우리 신문의 사과는 모기를 잡는데 대포를 쏜 것 같은 위화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원칙과 메뉴얼, 디테일도 좋지만 그것에만 매달리다간 숲이 아닌 나무만 보는, 정작 간과하지 말아야할 더 큰 개혁의 흐름을 놓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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