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대한민국남편들아] 크든 작든 앉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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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은 우리 집의 화약고다. 분쟁의 반이 그곳에서 발생한다. 환풍기를 켜지 않아도, 물 내리는 것을 잊어도, 나오면서 전등을 끄지 않아도 한바탕 총성이 울린다. 시트 올리지 않고 오줌을 누다가 방울이 시트에 튀었을 경우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발사되고 융단폭격이 쏟아진다.

"또야? 당신 정말!"

"미안해."

"눈 감고 갈겼어? 일등 사수였다며."

군에 있을 때 사격 하나는 잘했지만 오줌 누는 것은 사격과 다르다. 아무리 호흡을 가다듬고 집중해서 조준과 격발을 해도 방울 일부는 빗나가기 일쑤다.

"나이가 들수록 줄기도 약해지고 자꾸 갈라지네."

"그러니까 시트 올리고 보면 되잖아. 당신 정말 왜 그래요? 한두 번도 아니고."

시트 올리고 오줌 누는 일은 정말 성가시다. 오줌보가 남들보다 작은지 나는 오줌이 자주 마려운데 한두 번도 아니고 오줌을 눌 때마다 매번 시트를 올리고 내려야 하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다. 평소에는 잘 협조하는 편이지만 어제처럼 술 마신 날이면 오줌이 튀거나 말거나 시트도 올리지 않고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아내는 샤워기를 틀어 시트를 씻는다.

"이제부터 당신도 앉아서 눠."

"그렇게는 못해. 아니 안 해!"

"왜? 앉아서 오줌 누는 게 뭐가 어때서?"

"남자 체면에 어떻게 앉아서 눈단 말이야."

"그럼 똥은? 똥은 앉아서 누잖아."

"똥은 똥이고. 남자와 여자는 엄연히 신체구조가 달라. 여자야 앉아서 눌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남자는 다르잖아. 그런데 왜 앉아서 눠? 쪽 팔리게."

"똥 누다 오줌 나오면? 그땐 어떻게 해? 그때도 남자니까 쪽 팔리니까 똥 누다 말고 중간에 일어서서 오줌 눌 거야?"

"암튼 이건 남자의 자존심 문제란 말야."

화장실에서 나온 아내는 내 코앞에 바짝 다가와 앉는다.

"그런 게 바로 '오만과 편견'이야. 변기의 구조를 생각해 봐요. 집에 있는 건 남성용 소변기가 아니잖아. 오줌 나오는 곳과 변기 사이가 너무 멀어 오줌을 흘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안 그래요? 그리고 남자는 오줌 누고 꼭 털죠. 여기저기 오줌이 막 튀고. 시트 올려도 변기 주변에 몇 방울씩 흘리는 게 그런 이유 아냐? 얼마나 비위생적이야. 냄새도 나고 지저분하고. 도대체 같이 사는 여성에 대한 배려는 오줌 방울만큼도 없는, 그게 남자의 자존심이야?"

흥분하면 말이 막히는 남편과 달리 아내는 청산유수다. 말이 궁한 남편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그저 박명수처럼 버럭 소리나 지른다.

"암튼 난 싫어. 나는 남자야. 절대 앉아서 오줌 누지 않을 거야. 죽어도!"

어느새 격전지에 밤이 깊었다. 청산유수 아내는 잠이 들었고 '오만과 편견' 남편도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잠은 안 오고 오줌만 마렵다. 참다가 결국 나는 화장실에 들어간다. 물끄러미 변기를 바라본다. 내가 남자인데, 남자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인데. 나는 슬그머니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는다. 똥 눌 때마다 수없이 앉던 변기인데 전혀 느낌이 다르다. 나는 오줌을 누며 형사 콜롬보의 말을 떠올린다. "사람이 머물다 간 자리는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김상득 듀오 광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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