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정의용 안보실장의 ‘보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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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지난 4일 오전 청와대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스토커냐?”고 핀잔을 줬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미국을 방문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답하면서다. 실은 ‘스토커’ 발언 6시간 전 정 실장은 이미 워싱턴에 도착해 있었다. 존 볼턴 백악관 NSC(국가안보회의) 보좌관과의 회담을 위해서다. 그런데 ‘스토커’ 발언 2시간 뒤 정 실장 방미 보도가 나오자 “미 NSC의 철저한 비공개 요청이 있어 그랬다”고 말을 바꿨다. 뻔한 거짓말을 한 셈이다. 두 가지만 짚어 보자.

유지될 수 없는 비밀 혼자만 꽁꽁 지켜 #비핵화는 보안 아닌 공유, 지혜로 가능

먼저, 이게 비밀이 유지되는 사안일까. 워싱턴 직항은 하루 한 편 대한항공밖에 없다. 300명의 승객·승무원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마지막에 탑승하고 가장 먼저 내린다 해도 소용없다. 누군가에게는 노출된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세상이다. 이번 유출 근원지도 같은 비행기에 탑승했던 정치인이었다. 그런데도 정 실장은 보안이 유지될 것으로 생각했나 보다. 내려선 일반 출구가 아닌, 일명 ‘뒷문’으로 나갔다. 유지될 수도 없는 비밀을 혼자만 꽁꽁 지켰다.

또 하나, NSC가 정말 비공개를 신신당부했을까. 그래서 공식적으로 미 NSC에 e메일로 “청와대 말이 정말이냐?”고 질문했다. 답신에 그렇다는 말은 일절 없었다. 다음 날 같은 공항에 내린 야치 일본 NSC 국장은 대조적이었다. 똑같이 볼턴을 만나러 왔는데도 뒷문으로 빼는 일도, 거짓말을 하는 일도 없었다. 백악관 또한 마찬가지. 회담 당일 논의 내용을 친절하게 홈페이지에 공표까지 했다. 이쯤 되면 ‘나 홀로 극비’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정 실장은 볼턴과의 회담에 주미대사나 대사관 요원을 배석시키지 않는다. 보안을 위해서란다. 전임 맥매스터 보좌관 때도 그랬다. “파트너끼리만 만나야 한다”는 게 정 실장 생각이라 한다. 하지만 그럴 것이면 뭐하러 워싱턴에 대통령이 임명하는 특명전권대사를 두고, 외교부 최고 엘리트라 불리는 유능한 외교관 수십 명을 두고 있는가. 지난주 워싱턴을 방문한 김종대 의원은 인터뷰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며 “(정 실장이) 그냥 바람처럼 왔다 사라진다”고 했다. 사안의 민감성을 십분 이해한다 해도 비정상이다. 정보 독점이 왜곡된 외교로 이어진 사례를 우린 너무나 많이 봐 왔다.

‘볼턴 NSC’ 이후 눈에 띄는 건 한·미·일 NSC 수장 간 회동이 사라진 점이다. 전임 맥매스터 때는 중간 지점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시로 만나 ‘한·미·일 공조’를 다졌다. 이제는 같은 날 워싱턴에 있어도 서로 얼굴을 안 본다. 지난달 12일 정 실장은 백악관에서 오전 7시부터 볼턴을 만났다. 그리고 바로 오전 8시부터 볼턴-야치 회담이 있었다. 3자 회담을 피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같은 날 오전·오후로 나눠 따로 만났다. 볼턴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양자를 길들이기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볼턴은 순진 담백한 맥매스터와는 생각도, 내공도 차원이 다르다. 볼턴의 ‘한국 따로, 일본 따로’ 행보는 다가오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양국을 동시에 만족시킬 합의를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우려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정보가 없는 외교라인은 왜 그러는지조차 알 도리가 없다. PVID(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를 외치지만, 그 PVID가 ‘부분적으로 검증 가능한, 불완전한 핵 폐기(Partially-Verifiable, Incomplete Dismantlement)’가 되지 않도록 하는 건 정 실장 한 사람의 ‘보안’이 아닌 외교라인 전체의 공유와 지혜에 의해 가능한 시기가 됐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