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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50년]⑥혼자 시작해도 떼창으로 끝나는 묘한 전염성

중앙일보

입력

80년대 청춘의 배경음악으로 자리매김한 조용필.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이겨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중앙포토]

80년대 청춘의 배경음악으로 자리매김한 조용필.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이겨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중앙포토]

히트곡이 탄생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일까. 귀에 쏙쏙 박히는 가사? 심장을 바운스하게 만드는 멜로디? 그것도 아니면 신이 내린 목소리? 어느 것 하나 중하지 않은 게 있겠냐마는 자기 곡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한 능력 중 하나다.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설사 나타난다 한들 몰라보고 지나치기 십상일 것이다.

[조용필 노래 베스트 11] #1982년 4집 '못 찾겠다 꾀꼬리' #'고추잠자리' 김순곤 작사가와 호흡 #응원가나 데모송처럼 함께 내달려

그런 면에서 가수 조용필은 직접 곡을 만드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좋은 곡을 만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발굴자다. 작사가 김순곤씨와 만남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KBS 라디오PD가 프로그램에서 진행한 ‘시 콘테스트’ 당선작이라며 건넨 10편을 훑어보다 그의 글을 발견한 것. 그렇게 영감을 얻어 ‘고추잠자리’를 만든 조용필은 아예 작사가를 찾아 나섰다. 전남 광주까지 내려가 “그동안 써 둔 글 좀 보여달라”고 해서 탄생한 게 ‘못 찾겠다 꾀꼬리’다.

12일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시작되는 50주년 콘서트 투어 ‘땡스 투 유(Thanks To You)’를 앞두고 지난 2008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조용필 40년 울고 웃던 40년’ 시리즈를 디지털로 재구성했다. 당시 가수ㆍ평론가ㆍ소설가ㆍ시인ㆍ방송인 10명이 참여해 ‘조용필 노래 베스트’를 선정했다. 2008년 2월 5일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당시 하자센터 기획부장)가 ‘못 찾겠다 꾀꼬리’에 대해 쓴 기고문이다.

조용필 베스트 11이 궁금하다면

“못 찾겠다” 어린 추억…슬픈 ‘도돌이표’

1982년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못 찾겠다 꾀꼬리'를 부르는 조용필. [사진 유튜브 캡처]

1982년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못 찾겠다 꾀꼬리'를 부르는 조용필. [사진 유튜브 캡처]

오늘 ‘못 찾겠다 꾀꼬리’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옛날 딴 세상 같아진 1980년대를 더듬거렸다. 그 노래를 배경음악처럼 접했던 80년대는 나에게 뭐지? 기억은 이렇게 옹알댄다. 80년은 1월이 아니라 5월 광주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그해 7월 서울 미스 유니버스 대회, 81년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5월 여의도 국풍81, 82년 1월 야간통행금지 해제, 3월 프로야구 개막, 그리고 그해 5월 조용필 4집과 ‘못 찾겠다 꾀꼬리’가 세상에 나왔다고.

조용필 1집부터 11집까지가 80년대에 나왔는데, 80년대 중반 대학생이 된 내가 겪은 현대사와 감성은 그렇게 답하고 있었다.

2006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송년 대담을 나누고 있는 조용필과 송호근 서울대 석좌교수. 두 사람은 50대를 위한 '어느 날 귀로에서'를 함께 만들기도 했다. [중앙포토]

2006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송년 대담을 나누고 있는 조용필과 송호근 서울대 석좌교수. 두 사람은 50대를 위한 '어느 날 귀로에서'를 함께 만들기도 했다. [중앙포토]

80년대가 뭐지? 중ㆍ고생이었던 80년대 초ㆍ중반 당시의 나로 돌아가서 다시 말하라면 “그때는 조용필의 시대였어요”라고 또 다른 기억이 답한다. 누이가 사온 영화음악 LP판 전집을 통해 팝과 록을 맛보며 우쭐했던 그때, TV만 틀면 그가 나왔고 해마다 연말이면 상이란 상은 그가 휩쓸었으며, 툭하면 그의 스페셜 쇼가 방영됐다. 과외 금지였던 그 시절 나는 당시 20대 청춘이었던 누이와 함께 TV를 보며 저녁나절을 보냈고, 딱 그만큼 그의 모습과 그의 노래와 그의 패션을 접하며 80년대의 대중문화를 호흡했다.

그중 ‘못 찾겠다 꾀꼬리’는 또래 남자 애들이 모두 후렴구를 흥얼거렸던 최신 유행가였고, 캠퍼스 그룹을 결성한 교실 뒷줄의 몇몇 친구는 드럼이나 기타를 입소리로 연습하던 어려운 곡이었다. 나는 전자의 부류에 속했다. 이 노래는 조용필의 터져 나오는 보컬은 물론 시종일관 꽉 찬 록 사운드 때문에 시원하고 상쾌했으며 달뜬 기분을 줬다. 또한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언제나) 술래”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처럼 반복되는 소절은 그것만 따라 부르게 하는 중독성도 컸다.

1982년 발매된 조용필 4집. '못 찾겠다 꾀꼬리', '비련' 등이 수록돼 있다. [중앙포토]

1982년 발매된 조용필 4집. '못 찾겠다 꾀꼬리', '비련' 등이 수록돼 있다. [중앙포토]

하지만 10대를 마치고 20대를 보낸 10여년간 이 노래는 조용필의 다른 노래와 함께 내게서 멀어졌다. 20대의 나에게 충격과 분노로 들이닥친 80년대는 주류 가요의 ‘권좌’에 올랐던 조용필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았다. 민중가요와 함께 부르기엔 ‘못 찾겠다 꾀꼬리’는 너무 신났고 화려했으며 야했다. 그런데 30대가 되자 친구들은 하나 둘 노래방에서 그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너 그 노래 좋아했었니?” “그랬다”는 친구도 있었고, 그땐 스쳐 들었는데 이 나이가 되니 저절로 부르게 된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렇게 조용필은 노래방에서 친구들의 노래와 함께 다시 찾아왔다. 누가 독창하든 조용필 노래는 대부분 허밍으로라도 합창하며 끝났다. ‘못 찾겠다 꾀꼬리’가 특별했던 것은, 이 노래가 원래는 응원가나 데모송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고래고래 온몸을 쥐어짜 토해내듯 처음부터 ‘떼창’으로 내달렸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이면 가슴 밑바닥에 슬픔이 고였다. 90점 점수가 나와도 다들 소파에 기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왜 이러지?” 이 이상한 기분 탓에 ‘못 찾겠다 꾀꼬리’는 유령처럼 다시 내 앞에 출몰했다.

'불후의 명곡'에 출연해 '못 찾겠다 꾀꼬리'를 부른 김종서는 조용필의 칭찬에 눈물을 쏟았다. [사진 KBS]

'불후의 명곡'에 출연해 '못 찾겠다 꾀꼬리'를 부른 김종서는 조용필의 칭찬에 눈물을 쏟았다. [사진 KBS]

“그 많던 어린 날의 꿈이 숨어버려 / 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는 술래야 / 이제는 커다란 어른이 되어 / 눈을 감고 세어보니 지금의 내 나이는 / 찾을 때도 됐는데 보일 때도 되었는데…” 한 친구는 이 가사가 노래방 모니터에 굵은 글씨로 뜨는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고 했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를 쭉쭉 당차게 뽑아낼수록 비애감이 스물스물 차오르는 건 가사 때문이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2005년, TV에서 조용필의 평양 콘서트를 봤다.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 ‘못 찾겠다 꾀꼬리’가 나왔다.

“꺅꺅” 소리가 나와야 할 그 순간에 평양 관객은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했다. 그때 문득 느꼈다. “아, 나의 80년대는 평양 저기처럼 멀리 가 있구나. 내 청춘도 거기 있구나.” 그때 나는 이 노래를 짜릿하게 느끼면서도 싫어하려고 애썼구나 하고. 2008년 지금, 80년대와 조용필을 겹쳐 떠올릴 수밖에 없는 풍경은 내 것이 됐다. 그래서 ‘못 찾겠다 꾀꼬리’는 혼자 가볍게 흥얼거리든 노래방에서 빽빽 고함치며 합창하든 점점 더 슬퍼진다. 아니 이 노래는 첫선을 보인 그때부터 슬픈 노래였는지도 모르겠다.

조용필, 그때 내 마음은…

‘못 찾겠다 꾀꼬리’는 ‘고추잠자리’와 함께 동심을 표현한 노래다. ‘고추잠자리’를 발표한 지 1년 만에 내놓았다. ‘고추잠자리’를 작사했던 김순곤씨가 또 가사를 썼다.

이 노래는 ‘고추잠자리’와 정서는 비슷하지만, 템포는 전혀 다르다. 강한 비트를 넣어 록의 느낌을 강하게 했다.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보자는 데 중점을 뒀다. “얘들아~” 대목의 화음이라든지, 당시 국내에는 없던 음악을 만들어보자는 뜻이었다. 록에 국악을 접목한 ‘자존심’을 만든 것처럼, 새로운 시도로 가요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가사적으로는 동요와 접목을 시도했다. ‘난 아니야’도 그런 경우인데, 두 노래 모두 4집(1982년)에 수록됐다. 무등타기ㆍ술래잡기 등은 나 개인의 추억일 뿐 아니라 중장년층의 추억이기도 하다. 동요는 성인이 되면 잊어버린다. 이 때문에 어른이 돼서도 부를 수 있는 동요적인 가요를 만들고 싶었다. 노래를 부르며 순수했던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노래 말이다.

반응도 뜨거웠다. TV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 횟수를 제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노래뿐만 아니라 제목 ‘못 찾겠다 꾀꼬리’ 자체가 유행어가 됐던 기억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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