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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가 근본” 우리말 버리자고 주장한 북학파 박제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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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호 27면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⑤ 북학의 반민족성

북학파는 우리말 대신 중국어를 쓰자는 주장까지 했 다. 북학파의 주장이 실현되었다면 세종대왕 동상이 광화문에 자리 잡지도 못했을 것이다. [뉴스1]

북학파는 우리말 대신 중국어를 쓰자는 주장까지 했 다. 북학파의 주장이 실현되었다면 세종대왕 동상이 광화문에 자리 잡지도 못했을 것이다. [뉴스1]

조선 후기 북경에 다녀온 사람들이 남긴 기행문을 연행록이라 부른다. 북경의 옛 이름인 ‘연경’의 ‘연’자를 따왔다. 담헌 홍대용의 『담헌연기』,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 세 사람은 북학파라 부르기도 한다. 북쪽 청나라를 배우자는 주장을 해서 그렇게 불렀다. 북학도 실학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홍대용 “부끄럽기 짝이 없는 언어” #박지원 “입는 것은 모두 하얀 상복 #머리는 남쪽 오랑캐 방망이 상투” #민족문화 멸시했는데 “근대화 맹아” #20세기 한국학계 북학 찬양 일색 #진정한 사상 발전 동력 못 보게 해

북학은 북벌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북벌은 청을 정벌하자는 뜻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복수하려는 의미가 담겼다. 북벌은 효종과 송시열을 필두로 한 17세기 조선 권력층의 이데올로기였다. 『북학의』와 『열하일기』는 북벌을 비판한다.

‘북벌 대 북학’ 이분법 … 북학만 과한 칭송

북벌은 시대착오적인 반면 북학은 모두 진리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20세기 한국학 연구자들은 18세기의 실학과 북학에 과도하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성리학과 실학을 대립시켜 보는 이분법의 오류는 북벌과 북학에서도 반복된다. 북학에 대해 거의 찬양 일색이다.

강희-옹정-건륭제로 이어지는 17~18세기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대 영토를 개척했다. 명의 세 배에 달할 정도로 강대한 제국이었다. 홍대용(1765~1766)·박제가(1778)·박지원(1780)의 연행은 청 전성기의 후반이었다. 국방력이 허약한 조선의 청 정벌은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북벌은 청을 겨냥했다기보다는 국내용이었다.(계승범, ‘조선의 18세기와 탈중화 문제’, 『정조와 18세기』)

북벌의 이론적 기반은 주자학의 화이론(華夷論)이다. 본래는 문명의 중심(중화)과 변방(오랑캐)을 문화적으로 구분하는 이론인데, 주희는 이를 종족과 지리를 중심으로 차별하며 변질시켰다. 주자학에 의하면, 이적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과 금수의 중간에 속하는 존재였다.(『주자어류』) 조선의 정통 주자학자들은 이 차별적 화이론을 명·청 교체기에 적용했다. 조선에 은혜를 베푼 중원 한족의 명은 중화로, 조선에 치욕을 안긴 만주 여진족의 청은 오랑캐로 여겼다.

북학이 북벌을 비판했으므로 마치 화이론을 극복하고 탈(脫)중화로 나아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북학에서 근대적 민족의식의 맹아를 찾는 연구를 하기도 했다. 한국 근대화의 연원을 실학에서부터 찾으려는 20세기 한국학자들의 시도는 곳곳에서 무리한 해석을 낳으며, 근대화의 진정한 사상 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북학파가 청의 발달한 기술과 상공업 진흥을 배우자고 한 것까지 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박지원이 말했듯이 우리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오랑캐에게라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 문화를 지나치게 비하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닐까. 영·정조 시기를 ‘진경시대’라며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있듯이 조선의 18세기가 사회 경제적으로 그렇게 힘들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실학자의 표현을 보면 18세기 조선은 마치 문명 이전의 상태에 사는 것처럼 여겨진다.

박지원은 이렇게 말한다. “청나라의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조각에도 있었고 냄새 나는 똥거름에도 있었다.”(『열하일기』) 북학을 강조하기 위해 깨진 기왓조각이나 똥거름까지 아름답다는 극단적 표현을 썼다고 이해한다고 해도, 우리의 한복과 상투까지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문학 형식을 빌려 우리 풍속을 희화한다. “입는 옷이란 모두 흰 옷이니 이는 상주들이 입는 옷이고, 머리는 송곳처럼 뾰족하게 묶었으니 이는 남쪽 오랑캐의 방망이 상투이거늘, 이게 무슨 예법이란 말인가.”(『열하일기』)

1789년 연행을 다녀온 단원 김홍도가 1790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북경 유리창’. 유리창의 번화한 거리와 서점들은 조선 연행사들의 단골 탐방 코스였다. [사진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1789년 연행을 다녀온 단원 김홍도가 1790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북경 유리창’. 유리창의 번화한 거리와 서점들은 조선 연행사들의 단골 탐방 코스였다. [사진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북학파가 중국어를 ‘국어’로 채택하자는 주장까지 했음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홍대용은 말년 저작인 『의산문답』에서 주자학의 화이론을 극복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데 그런 홍대용조차 우리말을 “오랑캐 풍습”(夷風)이라며 부끄러워했다. 그는 연행에서 만난 청나라 유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사모하고 존숭하며 의관문물이 중화를 방불케 하여 예부터 중국에서 ‘소중화’라고 부르지만 언어만은 아직도 이풍(夷風)을 면치 못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담헌서』)

박제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중국어는 문자의 근본이다.… 온 나라 사람이 본래 사용하는 말을 버린다고 해도 안 될 이치가 없다.… 그런 연후에야 ‘이(夷·오랑캐)’라는 한 글자를 면할 수 있고 수천 리 동국(東國·조선)에 저절로 주·한·당·송의 기풍이 나타날 것이다. 이 어찌 크게 상쾌한 일이 아닌가.”(『북학의』)

서양 각국에서 근대적 민족의식을 진작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언어 민족주의’였다. 마르틴 루터가 기독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써서 많은 사람이 읽게 한 것은 독일과 프랑스가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의 핵심 이벤트였다. 자기 민족의 언어를 찾아가며 근대국가를 형성한 서양 각국과 비교하면, 북학파의 우리말 폐기 주장은 민족국가 건설의 흐름과 배치되는 것이었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외국의 앞선 제도와 문물을 배우자는 얘기가 조선 후기 북학파에서 처음 나온 것도 아니었다. 18세기 중반의 유학자 농암 유수원(1694∼1755)은 “중국은 표의문자를 쓰지만 우리나라는 표음문자여서 구태여 똑같이 할 필요가 없다”(『우서』)고 했다. 유수원은 중국의 발달한 제도와 도구를 배우자고 하면서도 언어·의복·음식 같은 고유의 풍속은 별개의 일로 보았는데, 이 같은 자주적 문화 의식은 15세기 유학자 눌재 양성지(1415∼1482)에서도 확인된다. 세조가 “나의 제갈공명”이라고 격찬했고, 정조는 그의 문집인 『눌재집』을 간행했을 정도로 중시한 양성지는 지역과 풍토가 다른 중국과 조선의 언어·의관·풍속은 다를 수밖에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의관과 언어가 중국과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정착되지 않아서 제나라가 노나라를 따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의관은 조복(朝服) 이외에 중국 복제를 다 따를 것이 없고, 언어는 통역관 이외에 반드시 전통 풍속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세조실록』) 언어와 복식까지 중국과 같아진다면 제나라가 노나라가 되는 것과 다름없다는 비유를 들면서 국가 존망의 문제로 여기고 있는 대목이 주목된다.(배우성, 『조선과 중화』. 한영우, 『조선 수성기 제갈량 양성지』)

임진왜란 의병장 중봉 조헌(1544~1592)이 16세기에 북경을 다녀온 후 쓴 상소문(‘동환봉사’·1574년)도 빼놓을 수 없다. 박지원과 박제가는 조헌을 본받으려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신분제 해소의 문제는 거론 안 했다. 조헌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명나라 제도를 본받자고 제안하며, 조선에서도 공·사노비를 양민화해 징병자원을 증대시키자고 주장한 바 있다.(민족문화추진회, 『연행록선집Ⅱ』)

박지원과 박제가는 조선이 배워야 할 청나라의 앞선 문물로 수레와 선박을 강조했다. 18세기 서구에선 영국의 증기기관 발명을 필두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미국은 1776년 독립혁명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해방되었고,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을 맞고 있었다. 명·청에서 많은 제도와 문물을 배워간 서구가 이제 청나라를 따돌리고 근대적 산업국가로 도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학파에 왜 그런 서구의 변화와 발전을 몰랐느냐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질문은 실학과 북학을 과도하게 띄어 놓은 20세기의 한국학자들에게로 돌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친청 북학파’와 ‘친일 개화파’ 멀지 않은 거리

18세기에 ‘민족’ 개념이 있었는가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다. 당시 사회적 규합 개념을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북학파가 우리의 ‘공동체 문화’ 혹은 ‘민족 문화’를 비하한 점은 20세기 연구자들이 짚었어야 했다. 근대 민족국가 형성의 연원을 규명하기 위해 북학이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기존의 통설에서 그 같은 비판적 시각은 보이지 않는다.

북학파의 ‘민족 문화’ 비하는 당대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로 이어졌다.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며 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 친일 개화파였다. 친청 북학파와 친일 개화파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청의 자리에 일본을 바꿔 넣으면 되는 것이었다. 매국으로까지 치닫는 친일 개화파의 반민족적 논리는 친청 북학파의 반민족적 사대주의에서 준비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북벌론은 많은 한계가 있었음에도 역설적으로 청에 독립적인 자세를 취하게 했다. 이 같은 독립적 자세를 ‘조선중화론’이라 부른다. 명나라가 망한 이후 한시적이긴 했지만 ‘조선도 중화’라는 자부심을 심어놓았다. 그 씨앗은 19세기를 거치며 전국의 수많은 일반 유생들 마음속으로 스며들어가 북벌과 북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대한제국의 창건이념으로 발전했다. ‘칭제요청 상소’를 쓴 일반 유생들은 저명한 주자학자가 아니었고 실학자나 북학파도 아니었다. 20세기 한국학자들이 소홀히 해온 그 일반 유생들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좀 더 살펴볼 예정이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자문 전문가=한영우·오금성·김영식 서울대 명예교수,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고동환 카이스트 교수, 장득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참고자료
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청계, 2018.
김인규, 『북학사상연구』, 심산, 2017.
김영식, 『정약용의 문제들』, 혜안, 2014.
배우성, 『조선과 중화』, 돌베개, 2014.
역사학회 편, 『정조와 18세기』, 푸른역사, 2013.
한영우, 『양성지』, 지식산업사, 2008.


실학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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