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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어떻게 히틀러를 이겼는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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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호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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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M. T. 앤더슨 지음
장호연 옮김, 돌베개

쇼스타코비치 작곡 ‘레닌그라드’ #독일 침공 받은 러시아인 위로 #스탈린 시대 공포정치도 이겨내 #고립된 시민 250만 명의 희망곡 #2차대전 연합국 승리에도 한몫 #스릴 넘치는 한 음악가의 일생

폭력은 안 된다. 폭력을 낳고 부추기고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전쟁·독재·전체주의도 안 된다. 왜? 논픽션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가 그 이유를 처절하고 생생하게 설명한다.

‘죽은 자들의 도시’보다는 ‘죽음을 이겨낸 자들의 도시’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수도 있는 책이다. 죽음보다 강한 음악의 힘을 찬양하는 책이기도 하다. 책의 중심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가 스탈린의 대숙청(1936~1938)과 히틀러의 872일 레닌그라드 봉쇄(1941년 9월 8일~1944년 1월 27일)를 배경으로 작곡한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가 있다.

레닌그라드 봉쇄는 역사상 가장 길고 참혹한 봉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당시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의 처지를 잘 형용한다. 스탈린은 수용소로 보낼 인원과 총살할 인원 쿼터를 각 지역에 할당했다. 독일이 침공하자 소련의 도시와 마을 7만여 곳이 사라졌다. 러시아 사람이 포함된 슬라브족이 열등한 인간 혹은 인간 이하라고 본 히틀러는 레닌그라드 사람들을 굶겨 죽이려고 작정했다.

스탈린과 히틀러라는 두 독재의 위협 속에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살기 위해 거짓말하고, 눈을 감고 침묵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모함하고 고발했다. 나 때문에 그가 수용소에서 노예노동을 하거나 총살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장정 3명이 레닌그라드 봉쇄로 사망한 사람들을 매장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리아 노보스티]

장정 3명이 레닌그라드 봉쇄로 사망한 사람들을 매장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리아 노보스티]

스탈린의 독재는 변덕스러웠다. 자신의 권력을 조금이라도 위협하는 기미가 보이면 표변했다. 오전에는 소비에트 영웅으로 칭송받다가도, 오후에는 반역자로 몰릴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수용소행이나 총살형을 결정할 사람이 먼저 처형당하는 바람에 무사하게 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엘리트주의자’ ‘반인민(反人民)’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결국 1948년 공연이 금지됐다.

‘900일 레닌그라드 공방전’으로 100만 명 이상의 레닌그라드 시민이 굶주림과 추위와 폭격으로 사망했다.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고 급기야 식인 행위까지 등장했다. 장례는 사치였다. 거리에 방치된 시신들을 행인들은 무덤덤하게 지나쳤다. 그들에겐 시신을 묻을 장비도 기력도 없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은 그런 참상의 한복판에서 탄생해 레닌그라드에 고립된 250만 명의 시민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사했다. 하지만 사망한 연주자들이 많아 오케스트라를 꾸리기가 힘들었다. 첫 연습에 나온 연주자는 고작 15명이었다고 한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병사들까지 단원으로 충원한 결과 1942년 8월 9일 핼쑥한 모습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 252쪽 분량의 교향곡 악보는 30m 길이 마이크로필름에 담겨 테헤란, 중동·북아프리카의 사막, 카이로, 브라질을 거쳐 미국으로 이송된다. 1926년 ‘교향곡 1번’을 19세 나이로 공연한 쇼스타코비치는 이미 미국을 비롯해 국제적인 명사였다. 소련 당국이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쇼스타코비치의 명성을 활용하려 한 것이다. 미국은 소련과 같은 편으로 참전했지만 공산국가 소련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결과는 대성공. 80여분 분량인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는 미국이 러시아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미국에서 1942년 7월 19일 초연된 이후 1년간 60회나 연주됐다. 소련 정부의 구상대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 등으로 구성된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소방관 제복을 차려입은 모습으로 1942년 7월 20일자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다. 그는 군입대를 신청했으나 심한 근시라 대신 소방관으로 복무했다.

쇼스타코비치는 매일 아침 6시 정각에 일어나 정장을 차려입고 서재에서 작곡을 시작한 지극히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가 스탈린 프로파간다의 선봉에 선 충성스러운 음악가였는지 역심을 품고 있었는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는 ‘교향곡 7번’의 레닌그라드 초연 33주년인 1975년 8월 9일에 사망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전기이자, 러시아혁명 이후 스탈린 시대를 다룬 역사서이기도 한 이 책은 대중에게 처음 소개되는 1차 자료를 포함해 119개 참고 문헌을 바탕으로 집필됐다. 1197개의 주석이 꼼꼼하게 달렸다. 학술서의 형식을 만족시키지만, 속도감 있는 스릴러 소설 같기도 하다. 어른보다는 오히려 14세 이상 10대와 20대 초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인 책이다. 2015년 뉴욕타임스·보스턴글로브·퍼블리셔스위클리가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whanyung@joo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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