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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이 공도 차는 나라 중국 …‘빅 핸드’ 전성시대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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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한우덕 기자 중앙일보 차이나랩 고문/상임기자

“믿어 달라.”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정치국 위원이 지난달 30일 청와대를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 말이다. 단체관광 제한 등 그동안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사드) 체계 갈등을 이유로 시행됐던 제재를 풀겠다며 한 이야기다. 그런데 의문이 제기된다. 중국의 누구를 믿어달라는 말인가. 중국 소비자? 정부? 아니면 공산당? 이 문제는 중국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정부와 시장의 역학 관계 말이다.

국가 힘 더 강해진 시진핑 2기 #민간 영역에 정부 개입 폭 커져 #IT 기업에 당 위원회 설립 확산 #성장 동력 민영기업 위축 우려 #‘시장은 국가의 부속품’ 전통 시각 #우리 기업의 中 전략에 감안해야

소비자를 믿어달라는 건 아닐 것이다. 중국은 이미 여러 차례 “사드 제재는 소비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며, 누구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 맞다. ‘정부가 나서 문제를 해결할 테니 믿어달라’는 얘기로 들린다.

그동안 ‘시장이 알아서 하는 일’이라고 방관하던 중국 정부가 이제는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나선 모습이다. 자기모순이다. 중국은 당이 국가의 모든 기구를 장악하는 ‘당-국가 시스템’의 나라다. 정부도 당의 방침을 수행하는 실행 조직의 성격이 짙다. 결국 “당이 사드 제한을 풀 테니 믿어달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중국은 그런 나라다. 겉으론 시장경제 체제로 움직이는 듯하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국가가 시장에서 ‘보이는 손(visible hand)’을 휘두른다. 축구에 비하자면 ‘심판이 공도 차는 꼴’이다. 심판은 게임을 관리하는 존재다. 경기가 과열되면 선수를 진정시키고, 반칙하면 옐로카드를 내민다. 서방 경제시스템에서의 국가 역할이 그렇다. 그러나 중국은 ‘심판이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공을 슬쩍 차주는 시스템’이다. 심지어 주장 행세도 한다. 국가가 경제에 직접 관여하는 ‘국가 자본주의(State capitalism)’의 전형이다.

중국의 권력집중과 민간 이양 역사

중국의 권력집중과 민간 이양 역사

이런 성향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2기 체제에 들어서면서 더 뚜렷해지고 있다. 시진핑은 새로운 당(黨) 건설을 내세우며 “당이 정치, 경제, 사회 등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가의 시장 개입은 더 폭넓게 용인된다. 월스트리트 저널 표현에 따르면 ‘빅 핸드(Big hand)’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사례는 많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지난해 10월부터 알리바바, 텐센트 등 IT 대기업 계열사 지분 1%씩을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타깃은 이사회 의석이다. 이사회 발언을 통해 IT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지난해 말 베이징 취재에서 만난 칭화대학 천(陳) 교수는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등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 IT기업에도 공산당 조직이 설립되고 있다”며 “IT 업체들은 지금 정부 눈치를 봐야 할 처지”라고 상황을 전했다. 인터넷 분야는 민영 경제를 대표한다. 성장의 허파 같은 구실을 한다. 그러나 이들이 통제 밖으로 벗어날 조짐을 보이자 권력은 여지없이 나타나 ‘빅 핸드’를 휘두르고 있다.

권력의 눈 밖에 나면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 ‘태자당(太子黨, 고위 지도자의 자제) 관시’를 바탕으로 공격적인 해외 투자를 늘려왔던 안방(安邦)보험은 경영권이 박탈됐다. 항공업계에서 시작해 해외 M&A로 몸집을 키워나가던 하이난항공(HNA) 그룹도 연내 직원 10만명을 잘라야 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무리한 해외 인수가 화근이었지만, 그들을 응징한 것은 시장의 힘이 아니라 정부의 ‘주먹’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저장(浙江)성의 민영 자동차 회사인 지리(吉利)는 지난 2월 다임러의 지분 9.69%(약 9조6000억 원)를 인수하는 등 해외 자산 인수에 광폭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상하이의 푸싱(復興)그룹은 같은 달 프랑스의 명품브랜드 랑방을 손에 넣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는가? 베이징의 한 투자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경제분석가 우(吳) 선생은 “저장성의 지리와 상하이의 푸싱은 시진핑 주석이 거쳐왔던 곳 기업”이라며 “중국 내에서도 ‘권력의 눈 밖에 나면 죽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상황을 전했다.

민영기업들은 몸을 낮출 수밖에 없다. 알리바바의 마윈(馬雲)은 요즘 “공산당이 지금의 번영을 이끌었다”라며 당을 찬양하고 있다. 충성 맹세로 들린다. 실리콘밸리를 능가할 정도로 창업 열풍이 불고 있는 선전에도 ‘초심을 잊지 말고 우리 사명을 기억하자(不忘初心 牢记使命)’는 등의 정치구호가 IT 회사 담벼락에 걸려있다. 텐센트 건물 앞에는 아예 ‘당과 함께 창업(跟黨一起創業)’이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경제에는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주장이 제기된다. 미국의 중국 전문가 데이비드 샴보 조지 워싱턴대학교 교수는 "국가의 통제와 간섭은 민간의 혁신 역량을 위축시켜 결국 경제 성장을 위협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민간의 성장동력이 위축되면서 국가가 다시 인위적인 성장정책을 쓰고, 결국 경제 왜곡만 심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그랬다. 1978년 개혁개방 추진 이후 중국은 권력을 민간에 이양하는 과정에서 성장의 동력을 확보했다. 중앙 권력이 강화될 때(收)보다 민간으로의 권력 이양(放) 때 경제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특히 후진타오 주석 제1기(2003~2007년)에는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에 따른 자유주의 사조가 풍미하면서 민간으로의 권력 하방이 뚜렷했다. 국내총생산(GDP)이 11%대 이상의 성장세를 유지하던 때다.

국가-시장 관계를 서방이 아닌 중국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와 시장 관계를 대립적이 아닌 보완관계로 인식하는 중국의 사유를 이해해야 최근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전인갑 서강대 교수는 "2100년 전 쓰인 사마천의 『사기』에도 시장은 언급된다”며 “역사적으로 중국은 시장이 존재하지 않은 때가 없었고, 시장은 경제를 유지해가는 부속 시스템이었다”고 말했다. ‘시장은 경제운용의 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덩샤오핑의 발언과 같은 맥락이다.

“시장은 국가 권력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였다.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고, 사회를 통제하면서 중국이라는 대일통(大一統)의 국면을 만들어내고, 인민들에게 먹고살 기반을 제공해 왔다. 그게 중국에서 시장과 국가의 관계였다.”(전인갑)

그런 면에서 본다면 중국 정부의 대표 한 명이 텐센트의 이사회에 참가하고, 국가가 안방보험의 경영을 책임지는 게 이해가 간다. 심판이 호루라기도 불고 공도 차는 시스템이 근저에 있었다. 양제츠 위원이 "믿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의 근거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의 대중국 정책, 우리 기업의 비즈니스 전략도 ‘중국 특유의 심판 시스템’ 이해에서 시작돼 함은 물론이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차이나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