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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동무 손열음의 새로운 녹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81호 27면

an die Musik: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

오닉스 레이블이 발매한 손열음의 모차르트 음반. 피아노협주곡 21번과 소나타(K330), 변주곡(K264), 판타지(K475)가 수록됐다.

오닉스 레이블이 발매한 손열음의 모차르트 음반. 피아노협주곡 21번과 소나타(K330), 변주곡(K264), 판타지(K475)가 수록됐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마지막 장면은 정지화면이다. 엘비라는 봄꽃 만발한 언덕에서 폴폴 나는 나비를 쫓다 마침내 두 손으로 나비를 감싸 쥐는데, 한 발의 총성과 함께 화면이 멈춘다. 잠시의 정적 뒤 그 화면 위에 또 한발의 총성이 겹쳐진다. 여자와 남자는 그렇게 죽고 그들의 사랑은 환하게 웃는 엘비라의 모습으로 박제가 된다. 이어 음악이 흐른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의 안단테.

사운드 트랙은 피아니스트 게자 안다(Geza Anda)가 연주했다. 모차르트의 고향 악단인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실내악단을 지휘까지 했다. 음색은 봄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들판처럼 적당히 흐릿해 인상파 풍경화 같은 화면에 잘 녹아든다.

모차르트의 21번은 프리드리히 굴다 등 몇 종류의 음반을 더 가지고 있지만, 그 곡을 ‘엘비라 마디간 협주곡’으로 만든 게자 안다의 연주를 좋아한다. 재킷에 엘비라를 쓴 것도 마음에 든다.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연인을 바라보는 그녀는 절망적으로 아름답다. 엘비라를 바라보며 안다의 연주를 들으면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감미롭지만 위태롭고 허기진 사랑의 도피행, 그리고 최후의 소풍.

내가 고대하던 엘비라 마디간 협주곡의 새 음반이 나왔다. 이 지면에 같이 칼럼을 쓰던 글동무 손열음의 연주다. 네빌 마리너경이 지휘한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와의 협연이다. 마리너경은 2016년 6월 이 녹음을 하고 10월에 타계해 그로서는 마지막 음반으로 기록됐다.

손열음의 모차르트 협주곡 해석은 정평이 나 있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특별상’을 받았다. 그때의 21번 연주 실황은 유튜브에서 1000만 뷰를 넘겼다. 모스크바 청중은 환호를 보내고,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깊이 공감하며, 심사위원들도 펜을 놓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영상을 보면서 그대로 음반으로 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새로운 녹음으로 나왔다. 모차르트 해석의 대가인 마리너경이 받쳐 주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몇 년 전 강원도 원주의 집으로 찾아가 열음을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음악세계가 궁금해 옛 피아니스트 중 누구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리흐테르, 호로비츠, 브렌델과 같은 거인들의 이름에 차례로 고개를 젓던 열음은 뜻밖의 이름을 댔다.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 그리고 이렇게 보탰다. “협주곡 말고 솔로를 들어보세요, 드뷔시요.”

바이젠베르크는 짧게 깎은 머리에 운동선수 같은 체격의 소유자로 바흐의 성가곡도 활활 태우듯 연주하는 에너지 넘치는 피아니스트다. 그런데 드뷔시는 달랐다. ‘달빛’을 누구보다 정밀하게 연주했다. 생각해 보니 열음도 마찬가지다. 그의 음반 ‘Modern Times’에 실려 있는 프로코피예프의 토카타를 듣고 놀랐다. 마지막 부분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열음의 타건에 그랜드 피아노가 중력을 잃고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열음은 힘과 기교만 내세우지 않는다. 그가 컴퓨터에 ‘Schmaltzy’(지나친 감상)라는 폴더를 만들어 저장해 둔 음악들은 속으로 타오르는 정열, 밤의 정적을 그린 것들이다. 드뷔시의 ‘렌토보다 느리게’와 같은…. 바이젠베르크도 손열음도 음악이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예술가다.

인터뷰를 마치고 열음은 나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고기를 구워 딱 적당한 타이밍으로 내 앞에 놓아주면서 자기도 착실히 챙겨 먹었다. 그 모습을 기억하는 나는 열음이 평창대관령음악제 예술감독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걱정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여러 가지 일을 잘하니까. 그래서 욕심을 부리자면, 음반도 더 자주 내주면 좋겠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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