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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평창올림픽이 열어준 남북 평화 회담의 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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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4·27 남북 정상회담은 6·25전쟁 휴전 이후 세 번째 정상회담이다. 이런 희망의 순간은 갈수록 양극화를 향해 치닫는 요즘 세상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드물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정치적 긴장이 급격히 고조됐고, 심지어 한반도에서 군사적 대결이 벌어질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스포츠가 남북 대화의 길 열어줘 #IOC, 모든 당사국과 외교적 노력 #평창올림픽은 공동의 성공 경험 #남북 모두 올림픽 여세 이어가길

지난 2월의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지난해 세계는 북한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호전적인 언사 등으로 위기 상황에 직면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의 긍정적 진전이 있기까지 올림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제관계에서 현실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고들 하기에 스포츠가 남북에 대화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일각에선 뜻밖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평창올림픽의 역사적 순간은 남북 선수들이 개회식에서 한반도기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 하나의 선수단으로 공동 입장했을 때였다. 이는 우연히 성사된 게 아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2014년부터 진행해온 협상 및 고위급 정부 인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결실이다. 이 과정은 IOC가 2014년 북한 선수들이 평창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특별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 한반도의 정치적 긴장은 현저히 고조됐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이어 미국과 유엔의 제재를 비롯한 대응책이 뒤따르면서 한반도에서 겨울올림픽이 열리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조차 의문의 대상이 됐다. 이에 IOC는 모든 당사국과의 외교적 노력을 강화했다. 엄격한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면서 평화로운 경쟁의 장에서 모든 민족의 화합을 이루는 올림픽의 근본적인 사명을 강조했다.

IOC는 특히 유엔에서 ‘올림픽 휴전’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역점을 뒀다. 올림픽 휴전은 IOC와 유엔이 부활시킨 3000년 역사의 전통이다. 올림픽 기간에는 모든 적대행위의 전면적인 중단을 촉구한다.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고려해 한국 정부와 함께 IOC는 모든 대회 참가자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는 내용을 결의안에 특별히 포함했다. 이 모든 공동 노력의 결과 결의안은 지난해 11월 열린 유엔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시론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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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과정에서 IOC는 북한 선수들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문을 줄곧 열어 두었다. 출전 신청 마감 기한을 연장하고 선수들에게 특별 출전권을 보장했다. 그러다 북한 지도자의 신년사 발표에 이어 남북 정부 모두가 이 문을 통과했다. IOC로서는 대단히 기쁜 일이었다.

그 후 IOC는 1월 20일 남북한 정부와 국가올림픽위원회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올림픽 한반도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통해 IOC는 북한 선수들의 평창올림픽 참가뿐만 아니라 한 깃발 아래 진행된 개회식 공동 입장과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을 성사시켰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이런 결정들이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순진함이 27일의 정상회담처럼 평화를 위한 협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순진하다’는 평가를 받아들이겠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100여년 전에 근대 올림픽대회를 부활시켰을 때 스포츠가 모든 민족을 평화로운 경쟁의 장에서 화합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제시하자, 이를 놓고도 많은 이들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18년에도 여전히 올림픽대회가 라이벌과 적들을 화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면,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이 순진한 발상은 계속해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 남북 지도자 모두를 만나 본 나의 인상에 따르면, 27일의 남북 대화에 대해 조심스럽게 낙관할만한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다. 내가 북한 지도자(김정은)와 만났을 때 그는 “얼어붙었던 북남 관계가 올림픽을 계기로 극적인 해빙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 기회를 제공해주고 길을 열어준 IOC의 공로였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줄곧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를 지지해왔는데 이는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이 대립의 소용돌이를 잠시 멈추고 그 여세를 평화의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올림픽은 문을 열어주었다. 정치인들은 첫 몇 걸음을 내디디며 이 문을 통과했다. 문지방을 넘어선 그들은 이제 막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평화를 논의하려 한다. 그들은 성공적인 평창올림픽이라는 공동의 경험을 갖고 이 회담에 임한다. 남북 지도자를 만나 본 나는 남북 양측 모두 올림픽에서 시작된 여세를 이어나갈 결연한 의지가 있다고 확신한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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