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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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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지난해 국내에서도 개봉했던 일본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를 뒤늦게 봤다. 무슨 공포영화도 아닌데 주인공 다카시의 직장 상사인 야마가미 부장이 등장할 때마다 보는 내 숨이 다 턱턱 막히고 심장은 벌렁벌렁했다. 고함치며 던지는 “실적부터 올려, 이 멍청아” “월급에서 깎는다” 같은 폭언은 차라리 애교 수준. 정강이 걷어차기부터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부인 이명희 이사장으로 추정되는 폭로 동영상 속 여성처럼 어깨를 거세게 밀치고 서류를 얼굴 위에 집어 던지는 건 예사. 퇴근하며 “내일 아침회의에 쓸 매출 데이터 정리해 놓으라”고 지시해 3개월 연속 야근만 150시간을 하게 만들면서도 사소한 실수에 온 부서원들 앞에서 무릎을 꿇리는 굴욕까지 선사한다.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에서 다카시(왼쪽)는 부장의 갑질에 시달린다.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에서 다카시(왼쪽)는 부장의 갑질에 시달린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요즘 이런 회사(상사)가 어딨어’라며 현실과 동떨어진 자극적인 오락영화라고 생각했으련만. 대기업(대한항공)에서부터 주목받던 스타트업(셀레브)에 이르기까지 일부 삐뚤어진 인성의 오너들이 시전한 무지막지한 갑질의 전형으로 온 사회가 떠들썩한 터라 오히려 극사실주의 영화처럼 다가왔다. 한 번은 지하철 선로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회사 옥상에서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린 다카시의 무기력한 공포에 격하게 감정이입이 될 정도였다.
죽을 마음까지 먹을 바에야 그냥 회사를 박차고 나가면 될 것을, 다카시는 “겨우 정직원으로 들어왔는데 관두는 게 쉽지 않다”며 온갖 부당한 대우를 그냥 받아들인다. 사실 다카시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직장인이 다 마찬가지 아닐까. 머릿속에서 그리는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부당한 갑질에 당당히 항의해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폭로 동영상 속 공사현장 직원처럼 도망가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하다.
문제는 복종의 결말이 가해자나 피해자, 그리고 회사 모두에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복종해서 마음이 편해지기는커녕 심적 고통은 더 깊어가고 그로 인해 자존감 저하와 근로의욕 상실까지 겪어야 한다. 이번 대한항공이나 셀레브 사건에서 목격했듯이 회사는 신뢰 하락으로 허우적대고 가해자 역시 끝이 좋을 수 없다. 맹목적 복종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 이유다.
팔로어십 연구의 개척자 아이라 샬레프가 쓴 『똑똑한 불복종』에는 맹인 안내견 얘기가 나온다. 안내견은 처음엔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련받지만 그다음엔 불복종, 다시 말해 주인을 따르는 게 명백하게 위험할 땐 복종하면 안 된다는 걸 배운다. 재밌는 건 안내견의 불복종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은 복종만 하는 안내견 때문에 제대로 된 안내를 받지 못해 결국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다고 한다. 내 이익을 위해서라도 불복종을 배우고 또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다시 영화 얘기. 노예처럼 복종만 하던 다카시는 “이 정도도 못 견디는 근성 없고 물러터진 자식”이라고 마지막까지 막말을 퍼붓는 부장에게 소심하면서도 대담한 불복종을 행한다. 그리고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