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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을의 반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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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을’의 반격이 거세다. 자신들을 농노(農奴) 부리듯 하던 총수 일가를 이참에 퇴진시키겠다는 기세다. 두 딸을 사퇴시키겠다는 사과로도 성이 안 차는 모양이다. 총수 일가의 비리와 갑질 사례를 수집하는 비밀 채팅방 참여자 수는 1000명을 향해 가고 있다. 총수 일가가 여객기와 직원을 동원해 개인물품을 무관세로 들여온다는 의혹이 제기된 곳도 여기다. 총수 부인의 막말과 갑질도 이곳에서 폭로됐다. 전직 임직원들까지 가세하고 있다. 노사분규도 아닌 상황에서 이처럼 직원들이 총수 일가에 대해 조직적으로 반기를 드는 사례가 또 있었던가 싶다.

신뢰받지 못하는 총수의 사과 #갑질의 피해자는 결국 국민들

하긴 총수 일가가 해도 너무했다. 그들의 행태는 갑질이라기보다 ‘패악(悖惡)’이었다. 녹취된 딸과 어머니의 울부짖음을 들어보면 그것은 화를 낸다기보다 정신분열에 가까웠다. 그런 게 얼마나 일상이었으면 녹음까지 했겠나 싶다. 인성은 바닥을 쳐도 능력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대한항공은 2013년부터 4년 연속 적자를 냈다. 누적 적자액이 2조원에 달했다.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땅콩 회항 사건’이 벌어진 게 2014년 12월 5일이다. 가뜩이나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에 오너 리스크나 안겨주고 떠난 게 큰딸이었다. 그녀가 없어도 대한항공에 경영 공백은 없었다. 오히려 임직원들이 상처를 수습하고 흑자로 반전시켜 놓았다. 지난해 800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그러자 땅콩 회항 때 “언니의 복수”를 다짐하던 막내딸이 더욱 큰 오너 리스크를 들고 왔다. 총수 일가의 존재 자체가 대한항공에는 가장 큰 위험인 것이다.

그 위험에 나도 의연할 수 없는 까닭은 내 돈이 그 회사에 들어가고 내 노후의 품질이 떨어질 위험이 있어서다. 한진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한진칼과 대한항공의 2대 주주가 국민연금이다. 총수 일가가 사고를 쳐 주가가 떨어진다면 국민연금공단의 손실로 이어진다. 국민들이 피해를 보는 것이다. 게다가 대한항공은 지방세특례제한법의 혜택을 받고 있다. 항공기 구입 시 취득세를 면제받고 재산세 50%를 감면받는 특례제도다. 한시적 제도지만 항공사 시장점유율 하락과 운임 상승 요인을 이유로 29년째 지원받고 있다. 사실상 독점적 특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막내딸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한 ‘은수저’가 과연 누가 준 것인지 알았어야 했다. 국민 앞에서 겸손해야 했고, 특히 오너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살리는 직원들에게 감사해야 했다. 내가 쓰면서도 내가 웃긴다. 그럴 사람들 같았으면 애초에 그런 수준 낮은 갑질도 하지 않았을 터다.

“지난 건 지난 거고, 물컵 하나 던진 걸로 왜들 난리냐”는 게 그들의 생각인 것 같다. 반성보다 제보자 색출에 더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4년 신년사에서 “외부인이 포함된 소통위원회를 만들겠다”던 회장의 약속이 허언에 그쳤고, 땅콩 회항의 최대 피해자인 박창진 전 사무장에 가한 행태로 미뤄 짐작이 어렵지 않다. 이번 사건 이후 대한항공의 첫 조치가 회장실 방음공사란 얘기도 들린다. 뒤늦은 사과가 설득력이 있을 수 없는 이유다.

회장실의 고함이 밖으로 새는 건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총수 일가의 신뢰와 리더십이 줄줄 새는 건 어떤 공사로도 막을 수 없다. 작전상 후퇴했다가 슬그머니 돌아오는 꼼수로는 구멍만 키울 뿐이다. ‘진정성’만이 그걸 막는다. 대한항공이 아니라 내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인 비디아다르 나이폴의 말이 떠올라서 더 그런다. “부잣집 망나니들로 가득한 사립학교 학생들은 석유 파동보다 더 미국에 위협적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