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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자연의 풍경 … 문명의 상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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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않아 고층건물 벽면 전체가 통째 광고로 변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지난달 정부가 확정한 '옥외광고 규제합리화 방안' 덕분이다. 비록 도심 내 일반 상업지역의 15층 이상 건물, 그것도 한쪽 벽면에 한정된 일이긴 하지만 가뜩이나 불량한 우리나라의 도시미관을 더욱 악화시키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다. 최근 일부 지자체가 거리 간판에 대한 관심을 늘리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지난해 이맘때 국회 문광위 간판 아래 '간판소위'가 설치된 것도 새삼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대도시에 맡긴 핵심 기능이 어차피 소비와 유행이라면 광고에 의해 도시 경관이 얼룩지는 현상 자체를 피하긴 어렵다.

그래서 도시 탈출은 달리 말해 자연 풍경에 대한 기대다. 하지만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순간 현실은 우리를 배반한다. 도로변 산과 들마다 무럭이 서 있는 야립(野立) 광고탑 때문이다. 창공을 가리고 산야를 해치는 것들 가운데는 상품 광고도 있고 기업 광고도 있다. 지자체나 공공기관이 광고주인 경우도 있고 대학 광고 또한 없는 게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강렬한 조명을 받으며 밤에도 결코 잠들지 않는다. 현행 관련법이 옥외광고물에 미관풍치(美觀風致) 유지 의무를 부과하고 있지만 실상은 사문화된 지 오래다.

언제부턴가 우리 시대의 노변 풍경은 광고판으로 가득하다. 업계에서 옥외광고판은 '완벽한 매체'로 알려져 있다. 누가 가서 끌 수도 없고 리모컨을 눌러 바꿀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광고 비평가 로리 매저가 '기둥 위의 쓰레기'라 불렀을까. 하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보름달처럼 생긴 광고판이 우주공간에 설치될 날도 멀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써 지구만이 아니라 우주의 풍광마저 인간에 의해 망가질 날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물론 자연 상태를 그대로 놔두는 게 최선이자 능사는 아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풍경은 언제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독일의 미술사학자 마르틴 바른케가 모든 풍경은 궁극적으로 '정치적'이라고 주장한 것은 과연 옳았다. 거대한 기념비에서부터 성채나 정원, 도로나 교량을 거쳐 경작지와 삼림 그리고 농가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야생(野生)의 상태조차 권력 구조와 지배 관계에 의해 부단히 창조되고 가공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고탑 역시 딴에는 풍경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만든 풍경이라면 얼마든지 아름답다. 인적이 전혀 없는 자연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하여 동양에서도 진정한 풍경체험은 자연에서 표정을 읽고 인기척을 느끼는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본질은 자연적 풍광에 대한 인간의 공격 자체가 아니라 인공(人工)의 수준과 품격이다. 일본의 경관학자 나카무라 요시오의 말마따나 "풍경이란 그 나라 민족의 작품"인 것이다. 이럴 때 우리의 고속도로 주변 풍경은 도무지 작품으로 감상되지 않는다. 너무나 큰, 그리고 너무나 많은 광고탑으로 정신이 산란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의 원조인 독일의 아우토반 주위에는 야립 광고탑이 없다. 그러나 지금 당장 우리의 현실이 이를 본받기는 어렵다. 우리에게 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따라서 광고탑들의 공간적 절제와 미관적 순화다. 풍경 파괴는 물론이거니와 환경 오염의 주역으로서 운전자들의 시선마저 훔쳐가는 현재 우리나라 고속도로 연변의 대형 광고탑들은 대단히 무례하고 위험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경제발전이 혹은 민주주의가 선진국의 최종 척도는 아니다. 한 나라의 국격(國格)을 가늠하는 것은 삶의 질에 대한 감수성의 미세한 차이다. 도로변 자연의 풍경에 가해진 야만의 상처를 지금쯤 한번 문명의 이름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우리는 문화 후진국으로 남아 있을 게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