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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0개 물놀이 튜브로 표현한 이민자 문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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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호 22면

스위스 로카르노시 광장 메운 설치 미술 ‘아폴리데’

스위스 로카르노 그란데 광장에 설치된 오피 드 베르나르도의 작품들. 15일까지 대중에게 공개됐는데, 11일부터는 누구나 원하는만큼 물놀이 튜브를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스위스 로카르노 그란데 광장에 설치된 오피 드 베르나르도의 작품들. 15일까지 대중에게 공개됐는데, 11일부터는 누구나 원하는만큼 물놀이 튜브를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스위스 남쪽의 호반도시 로카르노 구시가지 중심부에는 3500제곱미터(약 1060평)에 달하는 그란데 광장(Piazza Grande)이 있다. 이 널찍한 광장이 6500개의 형형색색 물놀이 튜브로 가득 메워졌다. 이 도시가 고향인 예술가 오피 드 베르나르도(Oppy De Bernardo·48)가 만든 설치 작품 ‘아폴리데(Apolide·무국적자)’다. 로카르노시의 후원 아래 지난달 30일 밤 12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의 협조로 완성됐다. 그는 도대체 왜 이 많은 물놀이 튜브를 광장에 설치한 걸까.

무리지은 홍합 튜브떼가 의미하는 것은  

멀리서도 눈에 띈 것은 가장 앞쪽에 무리짓고 있던 꽃분홍색 홍학튜브떼였다. 이 발랄한 홍학떼는 마치 ‘여기는 내 영토야’ 하고 말하는듯 빽빽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어 노란 토끼, 초록색 거북이, 하늘색 얼룩말, 회색 돌고래와 초록과 빨강이 섞인 수박, 핑크색 딸기 등 다른 종류의 물놀이 튜브들이 차례로 모습을 보였다. 맞은편 끝으로 가면서 홍학 무리의 수는 줄어드는 대신 다른 형태와 색상의 튜브들이 더 큰 무리를 이루며 어울리고 있었다.

혹시 홍학 튜브는 원주민, 그리고 다른 형태와 색상의 튜브들은 타지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틈을 주지 않고 똘똘 뭉쳐있는 앞쪽 구석의 홍학 튜브 무리는 이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적인 원주민 사회를, 다른 여러 튜브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홍학 튜브는 이민자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회를 의미하는 것 아닐까.

자세히 보니 튜브들은 서로 노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는 어쩌면 원하던 혹은 원하지 않던 서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을 표현한 것일지도 몰랐다. 바람이 빠지거나 터진 몇몇 튜브는 무리에서 멀리 떨어진 채 쓸쓸히 버려져 있었다. 타지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되거나 무시당해 결국 존재가 사라진 이민자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존재할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의 고통

오피 드 베르나르도는 의사 소통의 과정과 일상 현실의 지각 경계 연구에 관심이 많은 작가다. 역시나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현재 전세계, 특히 유럽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로 부각되고 있는 외국인 이주민 문제를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 설치 작품은 즉각적으로는 즐거움과 행복감을 가져다주며 관람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실제로는 무국적 이민자들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예술이라는 비정형적 관점에서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아폴리데, 즉 무국적자라는 의미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세계시민 사상부터 에라스무스의 사전 설정된 힘과 관련한 자율성에 대한 의식적 선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변주된다. ‘국적 없는’ 많은 이민자들(특히 하루에도 수 백명씩 유럽으로 불법 이주하는 아프리카와 시리아의 난민들)은 상황과 상태에 따라 그들이 속해있던 민족과 국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받을 근본적인 권리를 박탈 당한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가 한탄한 것처럼, 사람들은 종종 복잡한 상황을 간과하거나 단순화시킨다. 미해결 문제의 철학적 반성에 얽히는 것에 사람들은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소외와 파괴 상태를 피하는 ‘무국적’이라는 용어에 법적인 정의를 부여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 번의 퍼포먼스로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그러나 작가 오피 드 베르나르도는 짧은 시간이나마 로카르노의 그란데 광장을 더 이상 경계와 민족성과 인종 같은 차별이 없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초현실적이고 행복한 유토피아의 섬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발견하는 것은 관람객들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로카르노(스위스) 김성희 중앙SUNDAY S매거진 유럽통신원
사진 Locarno: ‘Apolide’ di Oppy De Bernardo <00A9> ⓒTi-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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