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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인 듯 금지 아닌 금지 같은 ICO 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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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정경민 경제담당 부국장

정경민 경제담당 부국장

‘17억 달러(1조8000억원)’. 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의 주인공 ‘드루킹’이 썼다는 독일 메신저 서비스 텔레그램이 암호화폐로 끌어모은 투자금이다. 텔레그램이 블록체인 기술로 만든 ‘그램(Gram)’이란 암호화폐는 연초 두 차례 큰손만 대상으로 투자금을 모집했는데 연타석 홈런을 터뜨렸다. 조만간 이어질 일반인 대상 ‘암호화폐 공개(ICO)’엔 훨씬 더 많은 돈이 몰릴 전망이다.

7개월째 법적 근거 마련 뒷짐 #투기 꺾인 지금이 제도화 적기

텔레그램은 이미 2억명의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으니 그런 게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 암호화폐 전문 매체 코인데스크에 따르면 2015년 7건 9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전 세계 ICO는 지난해 343건 55억 달러에 달했다. 올 들어선 두 달 동안에만 92건 31억 달러를 모았다. 현재 흐름이라면 올해는 지난해 세계 8위였던 한국거래소의 기업공개(IPO) 자금조달액 75억 달러를 넘길 태세다. 그만큼 ICO시장엔 새 일자리가 넘쳐난다.

IPO(Initial Public Offering)가 기업을 공개하는 것이라면 ICO(Initial Coin Offering)는 새 암호화폐를 시장에 내놓는 걸 말한다. IPO는 스타트업 단계를 넘어 수익을 내기 시작한 기업만 가능하고 증권 당국의 까다로운 규제도 받는다. 이와 달리 ICO는 사업계획을 담은 ‘백서’만으로 투자를 유치한다. 당국의 규제도 느슨하다. 혁신적 아이디어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쥘 수 있다. 시가총액 2위 암호화폐인 이더리움도 19살짜리 러시아계 캐나다인 청년이 만들었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아이디어 단계의 프로젝트이다 보니 실패 위험도 그만큼 크다. 더욱이 암호화폐 투기 바람이 불자 한탕을 노린 사기꾼이나 사이비 벤처기업가가 기승을 부리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정부가 ‘기술·용어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ICO를 금지’한 건 이 때문이다. 한데 당시 발표자료를 자세히 보면 정부의 ICO 금지는 법적 근거가 모호한 ‘방침’에 불과하다. 어떤 법에 따라 누가 ICO를 단속한다는 건지 설명이 없다. 게다가 ICO를 통한 자금 모집은 금지했지만 개인·기업의 투자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러다 보니 국내 기업이 주도하고 국내인이 주로 투자하는 ICO조차 무대를 스위스나 싱가포르로 옮기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그 사이 스위스는 지난 2월 암호화폐 종류에 따라 세 가지로 ICO 규제를 차등화하는 등 발 빠르게 제도 정비에 나섰다. 미국·일본·홍콩·싱가포르도 지분을 약속하거나 수익의 일부를 나눠주는 증권형 ICO에 대해서만 엄격한 규제를 적용하고 나머지는 풀어주고 있다.

한탕주의 ICO를 막기 위한 대안도 나오고 있다. 이더리움을 만든 비탈릭 부테린이 제시한 ‘DAICO’가 대표적이다. ICO에 ‘탈중앙화된 자율조직(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을 접목한 방식이다. 스타트업이 ICO로 거금을 모은 뒤 ‘먹튀’하지 못하도록 자율적인 투자자 풀을 만들어 돈을 관리하도록 하자는 제안이다. 스타트업이 미리 정한 목표를 달성할 때마다 투자자 조직이 돈을 분할해 주고 예산 증액이 필요하면 투자자 투표로 결정하자는 거다. 아예 개인은 투자한도를 두거나 간접투자만 허용하자는 주장도 있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이미 한 국가가 막거나 바꿀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 됐다. 주요 20개국(G20)도 오는 7월까지 암호화폐의 제도화와 규제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기로 했다. 암호화폐에 ‘묻지마’ 투자가 횡행했던 지난해엔 정부도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젠 투기 바람도 한풀 꺾였다. 국내 암호화폐 가격이 외국보다 터무니없이 비싸게 거래되던 ‘김치 프리미엄’도 옛말이 됐다.

지금이야말로 꽉 막힌 국내 스타트업의 ICO에 숨통을 터주고 암호화폐에 관한 규제의 틀을 만들기에 적기다. 문외한인 공무원끼리 골방에서 속닥거릴 게 아니라 국내외 전문가로 구성한 자문기구를 통해 공론화하는 게 정도다.

정경민 경제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