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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먹잇감이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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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국제부장

이상렬 국제부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보호무역 공세는 예견됐던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보호무역 공세 예견 됐건만 대처 노력 부족 #한국 경제, 환율 정책 자율성 제약 받는 시대 진입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말 정상회담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 면전에서 “당장 한·미 FTA 재협상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우리는 ‘설마’ 했다. 동맹인 한국과의 FTA가 트럼프 정부의 첫 번째 타깃이 되지는 않을 것이란 낙관이 우리 사회에 만연했다. 그런데 그 설마가 현실이 됐다.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은 이번에 FTA 개정 협상을 마친 뒤 “절대적인 윈윈(win-win)”이라고 평가했다. 엄밀히 말해 참여자들이 똑같은 이득을 보는 협상이란 없다. “윈윈”은 협상을 잘한 쪽이 상대방에 보내는 위로의 말이다. 기가 막힌 것은 한·미 FTA 개정 마무리와 ‘때맞춰’ 한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내역을 공개하기로 방침이 정해진 것이다. 미국은 이런 내용을 한국을 상대로 벌인 무역 협상의 전리품으로 선전하고 있다.

‘환율 주권’을 빼앗긴 것은 아니더라도 이제 환율 정책의 자율성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외환당국의 판단에 따라 마음대로 시장 개입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당국이 어떤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 지가 드러난 시장만큼 외환 투기 세력에게 근사한 사냥감도 없다.

환율은 우리처럼 수출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선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준다. 일반 국민이 해외여행 한번 가려 해도 환율 변화에 직격탄을 맞는 시대다. 이제 수출업자들은 정부의 환율 정책에 기대겠다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 산업이 그만한 자생력이 있느냐 하는 것인데, 산업 현장에선 불안감이 그득하다. 이번 환율 정책 협상에서 정부가 소홀했거나 미흡한 것을 대략 3가지로 꼽아볼 수 있겠다.

우선 투명성과 소통 부족이다. 한·미 재무당국이 한국 외환시장 개입의 투명성을 확대하는 방안을 협의 중이라는 소식은 외신 보도를 통해서 알려졌다. 한·미 FTA 개정 협상이 마무리된 직후였다. 정부는 FTA 협상과 외환정책 논의는 야구와 축구처럼 별개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전쟁이 났는데 육군 따로 해군 따로인가”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보다 설득력 있다.

둘째, 협상 논리가 달려 보이는 대목이다.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는 점을 자주 거론한다. 그러나 국제금융시장에 위기만 생기면 투자자들에게 현금인출기(ATM) 신세가 되는 우리 같은 나라가 얼마나 될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우리가 원인 제공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달러당 원화 가치는 1000원대에서 1500원대를 오갔고, 정부는 환율 안정을 위해 외환보유액 500억 달러를 들이부었다. ‘약한 곳’을 보고 달려드는 환투기세력을 떨쳐내는 일은 그만큼 어려웠다.

셋째, 우리 경제 현실에 대한 진단 부분이다. 현 정부 내엔 수출 증대보다 내수 확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원화가치 절상으로 수입물가가 떨어지는 것이 내수 증대에 도움 된다는 쪽이다. 그런데 경제 현실은 순진하지 않다. 원화 강세가 지속하더라도 내수는 기대만큼 살아나지 않고 해외 관광과 해외 소비가 오히려 크게 늘어날 것이란 지적도 있다.

한·미 FTA 개정이든 환율 합의든 우리 경제엔 상당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 정부의 밀어붙이기가 일차적 이유라고 하겠지만, 먹잇감이 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미국의 파상공세를 막아낼 준비와 의지가 부족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동연 부총리가 19일 미국을 방문해 므누신 미 재무장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등과 외환시장 개입 공개 범위와 방식 등을 최종 조율한다고 한다. 이럴 때 떠오르는 것이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다”는 말이다.

김 부총리의 선전을 기대한다.

이상렬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