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아람의 미주알고주알] 바둑계 '미투'를 취재하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 '미주알고주알(바둑알)'은 바둑면에 쓰지 못한 시시콜콜한 취재 뒷이야기를 다루는 코너입니다.


바둑계는 다른 동네에 비해 시끌벅적한 사건 사고가 별로 없는 조용한 곳입니다. 그런데 최근 바둑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미투(Me too)'입니다. 다른 동네에선 약 2개월 전쯤 파란을 일으켰던 '미투'가 이제 바둑 동네에 상륙한 겁니다.

#미투(Me too)

시작은 이렇습니다. 지난 4일 한 여자 프로기사가 프로기사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한국기원 내부 게시판에 '#미투'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과거 도장에서 선배 프로기사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도장의 여자 화장실에 몰래카메라도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대처나 사과는 없었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프로기사는 해당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의 글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연애 감정이 있었을 뿐, 기존 '미투'처럼 위력으로 강제한 적은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이 글은 더 많은 여자 프로기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가해자로 지목된 프로기사는 다시 한번 사과의 글을 올려야 했습니다.

프로기사 내부 게시판에 오른 '미투' 게시글

프로기사 내부 게시판에 오른 '미투' 게시글

이후 크고 작은 댓글이 붙기는 했지만 이상의 위력을 가진 '미투'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취재하면서 분명 잘못된 점이 있고,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는 후속적인 움직임이 크지 않아서 기사화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둑계 '미투'가 흐지부지 끝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던 지난 17일 한 외국인 여자 프로기사가 유명 바둑 해설가인 김성룡 9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의 '미투' 글을 내부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김성룡 9단의 입장을 듣기 위해 곧장 연락을 취해봤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관련기사

이제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김성룡 9단이 누려왔던 바둑계 입지와 영향력만큼 이번 사태에 대한 사회적 파장도 클 것입니다. 바둑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추락하지 않도록 한국기원 등의 대응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취재하면서 놀랐던 건, 이번 성범죄가 그간 바둑계에선 아무도 몰랐던, 피해 여성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밖의 피해 사례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들려왔지만 정작 피해 여성은 노출을 극히 꺼렸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선 바둑계의 특수성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투' 막는 바둑계 특수성 

다른 사회와 달리 바둑계는 극히 폐쇄적인 조직입니다. 현재 프로기사는 총 354명. 프로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도장 중심의 생활을 해야 하는데, 이때 같이 바둑을 배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입단 이후에도 선후배로 지속됩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같은 곳을 다니다가 같은 회사에 취직해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추행 등 피해를 보았어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어렵습니다. 가해자가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되는 상대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 얼굴을 봐야만 하는 익숙한 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둑계 '미투'는 '도장'에서 자주 벌어진다는 점에서도 특수합니다. 도장의 경우 보통 남자가 절대적으로 많고, 선생님은 대부분 남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한 여자 프로기사는 "입단을 꿈꾸며 바둑을 배울 때는 프로기사에 대한 동경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여자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남자 프로기사는 절대 권력을 갖게 된다. 이를 악용한 성범죄가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11일 한국기원에서 국가대표·연구생·소소회를 대상으로 한 성희롱 예방 교육이 진행됐다. 성희롱 교육이 실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투' 폭로가 계기가 됐다. [사진 사이버오로]

지난 11일 한국기원에서 국가대표·연구생·소소회를 대상으로 한 성희롱 예방 교육이 진행됐다. 성희롱 교육이 실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투' 폭로가 계기가 됐다. [사진 사이버오로]

또한 도장에서 기숙사를 운영하는 경우도 많은데, 제대로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성범죄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둑계는 남성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 데다 사회적 위치 또한 남성이 월등히 높은 곳인데, 양성을 존중하는 성교육이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와 구태의연한 악습이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이어져 온 것도 문제였습니다.

취재하면서 이번 '미투' 사태에 대해 불편해하는 남자 프로기사도 일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평온했던 동네를 어지럽힌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가해자로 적시된 프로기사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위드유(With you) 

하지만 겉으로 평온해 보였던 바둑계는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바둑계 '미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입니다. 소리 내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력했던 자신을 탓하며 오랜 세월 고통받았을 피해자도 많을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일을 계기로 수면 아래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추악한 현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겁니다. 더러운 현실을 직시하고 썩은 부분은 과감히 도려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공개적으로 나오기까지는 몇몇 여자 프로기사들의 기적 같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의 용기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