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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설영의 일본 속으로] "암은 사형선고가 아니다" 일본엔 일하는 암 환자 32만 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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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히다치(日立)제작소 IT사업분야에서 일하는 오타 요시코(40대) 부장은 암 환자다. 2016년 4월 유방암 진단을 받은 뒤, 수술을 3번이나 받았다. 하지만 한번도 휴직이나 병가를 사용하지 않고, 부서 이동도 없이 같은 위치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암 치료와 일 병행’ 확산 #휴직·병가 대신 연차·재택근무 #75% “진단 후 직장 관두지 않아” #"적절한 사회생활은 오히려 도움"

그가 2년 넘게 암 투병을 하면서도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회사의 제도적 뒷받침과 동료들의 배려 때문이다. 첫 수술 이후 2달만에 재수술을 받게 됐을 때 그는 회사 측에 “휴직을 하고싶다. 더 이상 치료를 받으면서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회사는 오히려 “인력 백업을 충분히 해줄테니, 출근을 계속해달라”고 제안했다.

도쿄도가 제작한 ‘암 치료와 일 병행’ 캠페인 비디오의 한 장면. 치료를 받은 동료(가운데)가 완치됐다는 결과지를 받자 기뻐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도쿄도가 제작한 ‘암 치료와 일 병행’ 캠페인 비디오의 한 장면. 치료를 받은 동료(가운데)가 완치됐다는 결과지를 받자 기뻐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실제 회사는 부장급인 그를 위해 타 부서에서 부장급 1명, 과장급 1명을 붙여줬다. “그냥 나오기만 해도 좋으니 회사에 나오는 게 어떠냐”라는 상사의 말에 그는 힘을 얻었다. 수술과 입원은 연차 내에서 해결했다. 연간 24일 발생하는 연차와 내년도 연차를 미리 끌어서 최대 48일을 쓰고, 장기 근속자에게 주어지는 재충전 휴가 5일까지 사용했다. 암 치료 중에도 회사에 나오면 오히려 기운이 솟았다. 직장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병마와 싸워 이기고 싶은 의욕이 더 생겨났다.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땐 재택근무를 하거나 단축근무를 했다. 처음부터 동료들에게 암에 걸렸다는 사실과 치료계획을 상세하게 알린 것이 동료들의 이해를 구하는데 도움이 됐다.

오타는 2016년 12월, 3번째이자 마지막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호르몬요법 치료는 계속 진행중이다. 그는 “치료에 전념한다고 집에만 있었다면 아마 병 생각만 했을 텐데 회사에서 업무 부담을 줄여줘서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도쿄도가 배포한 ‘암치료와 일 병행’ 리플렛. [윤설영 특파원]

도쿄도가 배포한 ‘암치료와 일 병행’ 리플렛. [윤설영 특파원]

일본에선 오타처럼 암 진단을 받고도 직장생활을 계속하는 ‘암 치료와 일 병행’ 개념이 확산하고 있다. 이미 2010년 일하며 암 치료를 받는 환자 수는 32만5000명이라는 정부 조사가 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평생 암에 걸릴 확률이 남자는 62%, 여자는 46%로 2명중 1명은 암을 겪을 만큼 흔해진 병이다. 동시에 의술의 발달로 완치율도 높아지고 치료법도 다양해 졌다.

암 환자의 입원 일수도 크게 줄었다. 입원 일수는 1996년 평균 35.8일에서 2011년 19.5일로 절반 가량 줄었다(후생노동성 조사). 암의 진행단계와 치료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입원하지 않고 통원하면서도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암은 이제 ‘불치병’이 아니라 ‘오래 관리하는 병’으로 바뀌고 있다. 암의 5년 상대생존률(암 진단 5년 뒤 생존해있는 비율)은 1993년~96년 53.2%에서 2003년~05년 58.6%로 높아졌다(2013년 국립암연구센터 조사).

지난해 7월부터 일본 대암(對癌)협회가 펼치고 있는 ‘~하면서(~ながら) 근로자’ 캠페인은 ‘암 치료와 일을 병행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내용이다. 암 진단을 사형선고인 것처럼 받아들이지 말고, ‘통원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면서’ 일을 계속하며 암 진단 이전의 일상생활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적절한 사회생활은 오히려 암 투병에 도움이 된다는 게 의사들의 설명이다.

실제 암 환자를 대상으로 2014년 도쿄도 복지보건국이 실시한 실태조사에서 75.7%가 암 진단 이후 직장을 그만두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80.5%는 앞으로도 직장생활을 계속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물론 여기엔 경제적인 이유도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계속 일하고 싶은 이유로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72.5%)가 가장 많았고 “치료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44.5%)라는 답변도 많았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2016년 후생노동성은 암을 비롯한 질병 치료와 직장 생활의 병행을 지원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기업들에 배포했다. 업무 때문에 병이 악화되지 않도록 사업장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는 한편 치료를 배려하는 관계자들의 역할, 사업장의 환경 정비, 개별 직원에 대한 지원 제도 등을 마련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렇게 나선 것은 극심한 일손 부족 현상과도 연관이 있다. 2013년 국립암연구센터 조사에 따르면 연간 약 82만명의 암 진단 환자 가운데 29%가 20세~64세인 생산 인구에 해당한다. 일손부족으로 허덕이는 일본에선 암 환자라고 해서 일을 그만두면 그 자체로 손실이 크다.

다만 사회적 인식은 아직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암 환자의 취업을 돕는 ‘캔서 솔루션즈’를 운영하는 사쿠라이 나오미 사장은 “암 환자는 곧 죽는 것 아니냐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 반대다. 생명의 한계를 봤기 때문에 더 열심이고, 높은 동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사쿠라이 사장 역시 2004년 유방암 진단을 받은 암 환자다. 디자이너였던 그는 암 수술을 받고 더 열심히 회사를 다녔다. 하지만 업무시간엔 동료들의 눈치를 보느라 마음이 편치 않았고, 통원치료를 하느라 연차를 다 써버리는 바람에 정작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2번의 퇴사 끝에 결국 직접 회사를 차렸다. ‘캔서 솔루션즈’엔 사원 9명 중 7명이 암을 경험한 적이 있다. 누군가 병원 치료 등으로 자리를 비우더라도 업무내용과 출퇴근 시간을 공유해 일의 구멍이 나지 않게끔 했다. 재택근무도 가능하다.

사쿠라이 사장은 “암의 종류나 치료방법, 부작용, 가족의 유무 등 환자가 처한 상황은 다 다르기 때문에 회사 지원 제도가 일률적이거나 실제 적용이 엄격하면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한국에서도 환자를 생각하는 제도, 조직이 마련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 snow0@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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