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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경륜 활용하던 조선 시대 ‘수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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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20)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남평문씨세거지 인흥마을의 모습. [사진 백종하 사진작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남평문씨세거지 인흥마을의 모습. [사진 백종하 사진작가]

지난 7일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남평 문씨 세거지에 점심 초대를 받았다. 잔치 자리다. 행사장인 인흥마을 수백당(守白堂)으로 들어섰다. 한옥과 노송이 어우러진 마당에 원탁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1998년 낙향해 20년째 마을을 지키는 중곡(中谷) 문태갑(文胎甲) 전 서울신문 사장이 88세 생신 미수(米壽)를 맞았다. 88세는 한자 ‘米’를 풀어쓰면 ‘八十八’이 돼 ‘米壽’로 부른다. ‘축 미수’ 글자가 선명한 케이크가 보였다. 오찬은 출장 뷔페다.

수백당의 마당에 마련된 미수 잔치. 생신을 맞은 문태갑 옹(가운데) 앞 케이크에 ‘축 미수’란 글자가 보인다. [사진 백종하 사진작가]

수백당의 마당에 마련된 미수 잔치. 생신을 맞은 문태갑 옹(가운데) 앞 케이크에 ‘축 미수’란 글자가 보인다. [사진 백종하 사진작가]

가족과 친지 등 50명 안팎이 모였다. 참석자들과 인사가 끝나자 한복 두루마기 차림의 중곡이 “여러분 덕분에 이렇게 살아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중곡은 걸음걸이가 정정하고 기억력도 또렷했다. 잔치는 마당에서 수제 맥주에 점심을 든 뒤 수백당 대청마루에 올라 관현악 4중주를 들으며 차를 마시는 순서였다.

문태갑 전 서울신문 사장의 미수 잔치 

미수연에 모인 가족과 친지들이 축하의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백종하 사진작가]

미수연에 모인 가족과 친지들이 축하의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백종하 사진작가]

행사장 수백당은 선비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1880∼1930) 선생을 기리는 공간이다. 수봉의 아들 5형제가 아버지를 기억하며 지었다. 중곡은 수봉의 손자다. 중곡의 조카 문석기(70)씨는 “인흥마을이 열린 이래 미수를 맞은 것은 작은아버지가 처음”이라며 “어른은 이런 행사를 원치 않았지만 그래서 강행했다”고 말했다.

중곡이 원탁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곡은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나오라’고 해 이렇게 차렸다”며 “나이 들면 아이들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싫지 않은 표정이다.

잔치에는 가족‧친지 이외 동네 어른들이 초대를 받았다. 이웃한 본리 1‧2동의 80세 이상 노인들을 모두 초청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 얼굴이 밝아졌다. 돌아갈 때는 떡을 싸서 전했다. 행사가 끝난 뒤 중곡은 “동네 어른들 모신 게 좋았다”고 했다.

100세 시대다. 통계청의 2010년 인구주택 총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100세 이상 고령자는 1836명이다. 지금은 더 늘었을 것이다. 분명 장수시대가 됐지만 그래도 한 개인이 나이 80에 이르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혼자 걸을 수 있는 80은 더욱 그렇다. 자체가 축복이다.

수명이 길지 않던 40년 전만 해도 61세 생신인 환갑(還甲)은 큰 잔치였다. 지금은 환갑이면 가족끼리 조용히 밥 한 그릇 먹고 여행 가는 시대다. 1997년 60세 생신을 끝으로 아버지를 잃은 필자로서는 환갑 역시 쉽게 오를 수 있는 고지가 아님을 절감했다.

노인을 '꼰대' 취급 말고 지역원로로 활용해야 

참석자들이 오찬을 마친 뒤 수백당 대청마루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다. [사진 백종하 사진작가]

참석자들이 오찬을 마친 뒤 수백당 대청마루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다. [사진 백종하 사진작가]

조선 시대 연세 80은 큰 복이다. 당시에는 그러면 관직까지 주어지는 경사가 겹쳤다. 세종 이후 연세가 80 이상이면 나라에서 일종의 명예직인 종2품 ‘수직(壽職)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하기도 했다. 경로(敬老)사상을 제도화한 것이다. 늘어나는 노인을 그저 ‘꼰대’로 치부하는 오늘날 이들의 경륜을 지역 원로로 활용해봄 직하다. 세대 간 소통도 넓히고 조상의 지혜도 잇는 일이 될 것이다.

80세가 넘으면 자식들이 생신을 기뻐하고 축하 상을 차리는 건 여전히 미덕이다. 그 자리에 인흥마을처럼 이웃 노인을 초대한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장수시대라지만 연로한 부모는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게 세상 이치다. 부모는 돌아가신 뒤 상다리가 휘도록 제사상을 차리기보다 살아계실 때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훨씬 낫다지 않은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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