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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 안 택배 차 없이도 집까지 배달오는 ‘착한택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1일 오후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 아파트. 택배 차량 한 대가 14단지 입구에 있는 경로당 문 앞에 멈춰섰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마친 택배 기사가 차의 뒷문을 열자 경로당의 문도 열렸다. 경로당 안에 있던 은발의 ‘대원’ 20명이 일어섰다.

이들은 힘을 합쳐 경로당에서 차 안까지 접이식 컨베이어 벨트(20m)를 깔았다. 그 사이 두 명은 재빨리 차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18명의 ‘대원’들은 컨베이어 벨트 양옆으로 도열했다. 경로당과 택배 차량의 ‘도킹 임무’를 수행한 이들 대원의 정체는 평균 연령 75세인 ‘실버 택배’ 기사들이다. 모두 노원구 주민이기도 하다.

실버 택배 기사들이 11일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 아파트 14단지 경로당에서 물품을 분류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실버 택배 기사들이 11일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 아파트 14단지 경로당에서 물품을 분류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택배 두고 가면 손수레로 집까지 배송 

차량 안에 있던 두 명의 실버 택배 기사는 900여 개의 물품 하나 하나를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옮겼다. “1407동이요. 이번엔 그쪽 물품이 많네. 부럽수~” 택배 송장에 적힌 작은 글씨는 ‘시력이 좋은’ 실버 기사들이 큰 소리로 읽어줬다. 기사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구역(동)의 물품을 경로당 한 켠에 쌓아갔다.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 아파트 14단지 경로당에서 한 실버 택배 기사가 택배 차량 안에서 물건을 내리고 있다. 임현동 기자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 아파트 14단지 경로당에서 한 실버 택배 기사가 택배 차량 안에서 물건을 내리고 있다. 임현동 기자

30여 분간의 작업 결과 82㎡(25평)의 경로당은 이들이 분류한 물품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실버 기사들이 각자 자신이 맡은 물품 앞에 앉자 경로당 안은 조용해졌다. 이들은 물품들의 송장을 일일이 떼어내 따로 모았다. 물품이 분실되거나 잘못 배송됐을 때 활용하기 위해서다. 대신 택배 물품들에는 동·호수 등을 큰 글씨로 적었다. 그 후 손수레‧전동차 등에 물품을 가득 싣고 배송에 나섰다. 김영원(76)씨는 “물건을 받고 좋아하는 주민을 보면 보람이 크고, 일이 재미도 있다. 5년을 매일 같이 하다보니 이제 택배 송장에 적힌 이름만 보면 주소가 떠오를 정도”라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 아파트 14단지 경로당에서 택배 물품을 분류하는 실버 기사들. 임현동 기자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 아파트 14단지 경로당에서 택배 물품을 분류하는 실버 기사들. 임현동 기자

일부 신축 아파트들이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는 가운데 이 같은 ‘실버 택배’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택배 기사가 아파트 내 지정된 장소에 물품을 두면, 65세 이상 지역 노인들이 각 가구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다. 따라서 택배 차량이 단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택배 차로부터 ‘보행 안전’을 지키려는 주민과 택배를 가정으로 배달해야 하는 기사들이 상생하는 ‘착한 택배’란 평가가 나온다. 주로 지역 사업단, 택배 회사, 지방자치단체 등이 운영한다.

“택배 차 안전·공해·소음 문제 사라져” 

노원구 상계주공 아파트의 실버 택배단은 12~14단지 4800세대의 택배 물품을 책임지고 있다. 이들은 주민들이 택배를 보내려는 물품도 맡아서 택배 기사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실버 택배를 이용하는 주민들의 만족도는 높다. 상계주공 14단지의 주민대표 유애순(60)씨는 “사실 단지에 택배 차량이 자주 다니면 안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매일 봐서 얼굴을 잘 아는 어르신들이 배송해주니 믿음도 간다”고 말했다. 실버 택배 기사 이은호(80)씨는 “배달 가면 반기면서 커피나 과일을 내주는 주민들도 있다”고 했다.

실버 택배 기사들이 경로당에 도착한 택배 물품을 분류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실버 택배 기사들이 경로당에 도착한 택배 물품을 분류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실버 택배가 활동하는 이 아파트 단지 안에선 택배 차량을 보기 힘들었다. 하루에만 택배 차 수십대가 드나드는 여느 아파트들과는 사뭇 달랐다. 14단지 관리소장 최선규(62)씨는 “택배 차들이 유발하는 공해나 소음 문제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실버 택배 기사가 택배 송장을 떼어낸 후 주소를 적고 있다. 임현동 기자

실버 택배 기사가 택배 송장을 떼어낸 후 주소를 적고 있다. 임현동 기자

배송을 하다가 주민이나 관리인과 갈등을 겪곤하는 기사들도 환영한다. 택배 기사 우모(42)씨는 “비나 눈이 오는데 택배 차를 단지 안에 못 들어가게 할 때가 가장 난감하다. 옷은 젖어도 되지만, 물건이 젖으면 손해 배상까지 각오해야 한다”면서 “특히 택배 차를 못 들어가게 하는 아파트들에선 꼭 필요한 서비스 같다”고 말했다.

많을땐 하루 90건 배송해 월수입 100만원 

실버 택배 기사들은 늘고 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 따르면 전국의 ‘실버 택배’ 기사는 지난해 1월 515명에서 같은 해 9월 2066명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관계자는 “집계에 포함돼 있지 않은 택배 회사 등에서 운영하는 실버 택배 기사들까지 감안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버 택배 기사들은 자신이 맡은 구역의 물품들을 경로당의 한켠에 차곡차곡 쌓았다. 임현동 기자

실버 택배 기사들은 자신이 맡은 구역의 물품들을 경로당의 한켠에 차곡차곡 쌓았다. 임현동 기자

노원구 상계주공 아파트의 실버 택배단은 일인당 하루에 40~90건씩을 배송한다. 택배 회사로부터 한 건당 500원씩을 받아 한 달에 50만~100만원의 수입을 올린다.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비용 부담은 전혀 없다.

실버 택배 기사가 전동차에 택배 물품을 싣고 있다. 임현동 기자

실버 택배 기사가 전동차에 택배 물품을 싣고 있다. 임현동 기자

실버 기사 김길현(72)씨는 “운동도 되고 치매 예방도 하면서 돈도 버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했다. 노원구 상계주공 아파트의 실버 택배단은 주민 이승희(83)씨가 2009년 노인 5~6명을 모아 시작했다. 지역 반응이 좋자 정부·구청‧기업 등의 후원을 받으면서 규모가 커졌다. 이씨는 “실버 택배는 택배 기사들과 고객 사이를 연결해주고, 갈등을 최소화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실버 기사가 물품을 손수레에 싣고 배송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실버 기사가 물품을 손수레에 싣고 배송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물품을 전동차에 싣고 배송하는 실버 기사. 임현동 기자

물품을 전동차에 싣고 배송하는 실버 기사. 임현동 기자


“거점·인력 시스템 갖춰야 택배 분쟁 해결” 

고령의 택배기사에게 고충도 있다. 70~80대 노인에게 무거운 물건을 들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저층 아파트를 오르는 건 쉽지 않다. 실버 기사 박모(81)씨 “집 주인이 없어서 경비실에 맡기고 가면 ‘왜 집까지 안 가져다 줬느냐’면서 항의하는 주민도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배송하고 있는 실버 택배 기사. 임현동 기자

아파트 단지 안에서 배송하고 있는 실버 택배 기사. 임현동 기자

전문가들은 ‘택배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선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이정희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교수는 “택배는 포화 상태인데, 주민들이 보행권과 집까지 배달해주는 편리함 두 가지 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갈등은 생길 수 밖에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공동주택엔 택배 물품을 모아두는 거점과 이를 배달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해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버 택배가 체계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 지역 주민, 택배 기업 등이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말했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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