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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의 시시각각]그해 4월 17일, 박근혜 추락의 시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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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호 34면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애당초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면, 대통령 선거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최순실을 멀리했다면, 하야를 선언하고 조용히 살았더라면 …. 어쩌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서울구치소에서 불면의 밤을 보냈을지 모른다. ‘사랑의 블랙홀(1993)’ 같은 영화에서처럼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는 어느 때로 가고 싶을까. 내게 묻는다면 2014년 4월 17일 오후를 떠올려 보라 하겠다.

유가족 안아주고 함께 울었다면 #비극적 몰락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날 박 전 대통령은 진도체육관에 갔다. 전날 아침에 침몰한 세월호 안에 자녀가 갇혀 있는 부모들이 있었다. 그는 연단 위에서 마이크를 들고 “책임” “엄벌” 등의 단어를 쏟아냈다. 말이 이어지는 동안 주황색 점퍼를 입고 작은 배낭을 멘 40대 여성이 연단 바로 앞까지 뛰어나왔다. 그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뒤 “아이를 살려주세요”라며 울먹였다. 박 전 대통령은 연단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곁에 병풍처럼 서 있던 공무원들에게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하고는 곧바로 떠났다. 체육관에 머문 시간은 30분 정도였다. 실종자 가족과 몇 차례 손을 잡기는 했으나 안아주지는 않았다. 오락가락하는 브리핑과 구조작업에 격앙된 가족들이 대통령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항의했는데, “이게 국가냐”는 고함도 있었다. 이 외침은 2년 반 뒤에 “이게 나라냐”로 진화해 광화문에서 울려 퍼졌다.

닷새 뒤인 22일에 독일 언론 매체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는 ‘얼음처럼 차가운 독재자의 딸’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이해하기 힘든 진도체육관의 풍경을 소개했다. 체육관 방문에서 약 3주가 지난 5월 9일 오전 3시 30분에는 세월호 유족 100여 명이 청와대에서 100m 떨어진 곳에서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외쳤다. 대통령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박준우 정무수석이 그들을 대면했다. 열흘 뒤 박 전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세월호 침몰 뒤 한 달 하고도 6일이 지난 때였다. 그렇게 육영수 여사가 남겨 준, 국모(國母) 이미지 유산을 몽땅 날려버렸다.

과거에 대한 가정만큼 허망한 일도 없다지만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박 전 대통령이 연단 아래로 내려가 그 여인을 부둥켜안고 함께 펑펑 울었다면…. 아예 체육관 한편에 책상을 놓게 하고 “지금부터 다른 주요 현안은 총리가 맡고 나는 이곳에서 보고를 받겠다”고 선언했다면…. 한동안 현장에서 수습 상황을 챙긴 뒤 청와대로 돌아와서는 유가족들을 수시로 만났다면…. 그리고 다음 해의 메르스 사태 때도 발 벗고 뛰는 모습을 보였다면….

만약 그랬다면 지지도가 사상 최고치에 이르고 부친보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4월 16일의 뒤늦은 대통령 등장과 ‘수상한 7시간’에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해도 대다수의 국민은 대통령 편에 섰을 것이다. 트집을 위한 트집이라 비난이 쏟아졌으리라. 훗날 최순실과의 관계가 탄로 났어도 “국민 마음에 더 와 닿는 언어로 연설문을 고치는 정도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 이상의 잘못이 드러났어도 탄핵당하고 구속되는 일까지는 겪지 않았을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총격 사건으로 숨진 흑인 목사의 장례식장에서 눈물 흘리며 찬송가 부르는 장면에 우리 국민이 열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세월호는 박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고 귀가한 날 바로 다음 날에 물 위로 인양됐고, 구속 수감된 바로 그날 반잠수식 선박에 실려 육지로 이동했다. 노자(老子)는 “하늘의 그물은 엉성해 보이지만 결코 놓치는 것이 없다(天網恢恢疎而不漏·천망회회소이불루)”고 했다. 현자의 가르침이 무섭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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