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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은 마늘과 컬링의 고향? 4월 주인공은 산수유꽃이었네

중앙일보

입력

“의성? 영미 고향?”
마늘의 고장 정도로 알려졌던 경북 의성군의 수식어가 달라졌다.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거머쥔 여자 컬링 국가대표 덕분이다. 컬링 선수 4명의 고향으로 알려지면서 위상은 높아졌지만 5만3000명이 사는 농촌은 달라진 게 없다. 봄이면 어김없이 농민 일손이 바빠지고, 4월에는 어김없이 산수유꽃이 만발한다.

'산수유마을'로 불리는 경북 의성 사곡면 화전리에 산수유꽃이 활짝 피었다. 산수유마을에는 수령 440년에 달하는 노거수를 비롯해 산수유나무 약 10만 그루가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달 중순까지 만개한 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산수유마을'로 불리는 경북 의성 사곡면 화전리에 산수유꽃이 활짝 피었다. 산수유마을에는 수령 440년에 달하는 노거수를 비롯해 산수유나무 약 10만 그루가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달 중순까지 만개한 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리틀 포레스트’에 나온 그 풍경

산수유꽃 활짝 핀 의성 산수유마을.

산수유꽃 활짝 핀 의성 산수유마을.

“마을엔 마땅한 식당이 없심더. 읍에서 뭐라도 잡수고 오이소.” 지난달 29일 노훈(58) 의성 산수유마을 사무국장의 말을 듣고 의성공설시장부터 들렀다. 장날이 아니어서인지 시장은 한산했다. 어둑한 가게 안쪽에서 아낙들이 마늘을 까고 있었고, 오래된 대장간에선 촌로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시장 전체가 춘곤증에 잠긴 듯 공기마저 나른했다. 소머리국밥 한 그릇 먹고 산수유마을로 향했다.
고층 아파트 들어선 의성읍을 벗어나자마자 이곳이 산수유의 고장임을 알려주는 풍경이 펼쳐졌다. 912번 지방도 가로수가 죄 산수유나무였다. 심은 지 얼마 안 된 키 작은 나무들이었지만 노란 꽃망울이 잔뜩 피어있었다.
20분 만에 사곡면 화전리, 산수유마을 어귀에 다다랐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봤던 한 장면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혜원(김태리)이 자전거 타고 좁은 농로를 달리는 장면. 길 왼편에는 초록 마늘밭이 싱그럽고, 오른편엔 어른 키의 세 배는 족히 넘는 산수유나무가 샛노란 꽃을 틔운 장면을 여기서 촬영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대부분 경북 군위에서 촬영했다.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산수유꽃 만발한 농로를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장면은 의성 산수유마을에서 촬영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대부분 경북 군위에서 촬영했다.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산수유꽃 만발한 농로를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장면은 의성 산수유마을에서 촬영했다.

김태리가 아닌 노훈 사무국장과 함께 꽃길을 걸었다. 노 국장이 먼저 안내한 곳은 산수유 시목지(始木地)였다. 노거수 세 그루가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 나무들은 약 440년 전에 이 자리에 심겼다. 조선 선조 13년(1580년) 마을 벼슬로 부임한 노덕래가 개울둑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산수유나무를 심었다. 화전 3리는 경주 노씨 집성촌이다.
산수유는 20~30개 꽃이 한 뭉텅이로 피는 모습 뿐 아니라 나무 모양도 독특하다. 줄기가 두툼한 아름드리가 아니라 수많은 갈래로 이뤄졌다. 가장 오래된 나무는 줄기가 23개에 달한다. 이 나무 한 그루에서 산수유 열매 100근(약 60㎏)이 난다. 씨를 뺀 무게다. “지금은 농기구가 좋아져 힘 덜 들이고 산수유를 따지만 어렸을 땐 나무에 올라타 열매를 따고 한 알 한 알 과육을 벗겨냈지요. 나뭇가지가 보기보다 엄청 억세거든요.” 노 국장이 가지 하나를 부러뜨릴 듯 꺾었는데도 멀쩡했다.
화전2·3리에는 수령 300년이 넘는 산수유나무만 3만5000그루에 달한다. 비교적 최근에 심은 나무까지 더하면 10만 그루가 넘는다. 개울가와 논둑 뿐 아니라 동구길, 산등성이도 노랗게 물들었다.

사곡면 화전리는

사곡면 화전리는

화전리에서는 2003년 산수유꽃축제를 시작했다. 한데 지난해와 올해는 된서리를 맞았다. 조류인플루엔자(AI)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아예 축소가 취소됐고, 올해는 ‘축제’에서 ‘행사’로 지위가 낮아졌다. 군청의 지원 없이 주민들이 주도하는 행사여서 다른 지역의 봄꽃축제보단 초라하다. 그러나 주민들 말마따나 꽃은 예년과 다를 게 없었다. 도리어 방문객이 적어 차분하게 꽃을 감상하기엔 더없이 좋다.
비교적 넓은 평야가 있는 화전 3리와 달리 산골짜기에 들어선 화전 2리는 훨씬 아기자기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려있고 다래넝쿨이 많아 예부터 ‘숲실’로 불리던 마을이다. 마을 뒷산 전망대에 오르니 아늑한 마을 풍경이 고스란히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 방향을 둘러봐도 골짜기마다 노란 물감을 뿌려 놓은 듯했다.

고즈넉한 사촌마을과 고운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화전2리 마을. 골짜기에 들어앉은 마을이어서 예부터 '숲실'이라 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화전2리 마을. 골짜기에 들어앉은 마을이어서 예부터 '숲실'이라 했다.

골짜기마다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산수유꽃이 만발했다. 가을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는 것도 같다.

골짜기마다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산수유꽃이 만발했다. 가을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는 것도 같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부녀회 회원들이 행사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가마솥에 두부를 찌고, 채소를 다듬는 손길이 분주했다. 길모퉁이에는 배영희(67) 할머니가 좌판을 깔고 말린 산수유·서리태·땅콩 등을 팔고 있었다. “우린 쉴 틈이 없어요. 6월에 마늘 수확하면 그 자리에 모내기 해요. 10월에 추수하고 11월에 마늘 심고 나면 이듬해 1월까지 산수유 열매 따서 말려야 하죠. 틈틈이 콩과 고추도 거둬야 하고.”
산수유마을을 먹여 살리는 건 산수유만이 아니었다. 사실 가장 중요한 작물은 마늘이다. 화전리 주민 수입의 80%가 마늘이란다. 행사 음식을 준비하던 임순자(71) 할머니가 마늘 자랑에 열을 올렸다. “의성 마늘 먹다가 다른 거 먹으면 영 심심허지. 컬링 선수들이 꿀에 절인 마늘 먹고 힘냈다잖소.”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다. 의성 마늘은 일교차 큰 지역에서 자라는 ‘한지(寒地)형 마늘’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난지형보다 씨알이 작고 옹골차다. 매운맛과 단맛이 강하고 살균작용을 하는 ‘알리신’ 함유량이 많다. 사화산(死火山)인 금성산(530m)에서 나온 화산 토질과 큰 일교차가 의성 마늘 맛의 비결이란다.

의성에서는 주로 '한지형 마늘'을 재배한다. 일교차 큰 지역에서 자라는 종으로, 맵고 단맛이 강하다.

의성에서는 주로 '한지형 마늘'을 재배한다. 일교차 큰 지역에서 자라는 종으로, 맵고 단맛이 강하다.

의성 마늘 몇 쪽 먹었다고 힘이 불끈 솟는 건 아니지만 마늘을 활용한 이색 음식은 맛볼 만하다. 의성공설시장 안팎에 맛집이 많다. 마늘삼계탕·마늘통닭·마늘짜장면 뿐 아니라 마늘 넣은 사료를 먹고 큰 소·돼지고기도 맛볼 수 있다.
산수유와 마늘 말고도 의성의 자랑거리는 많다. 의성을 전국에 알린 게 컬링이지만 의성컬링센터는 일반인이 이용할 수 없다(오는 9월 일반인을 위한 컬링체험장이 개장한다). 대신 문화유산이 많다. 삼한시대 초기 국가인 ‘조문국’의 유적, 천년고찰 고운사가 유명한데 동선을 잘 짜야 한다. 의성 면적은 서울의 두 배에 가깝고 산길과 비좁은 도로가 많아서다.

여자 컬링 대표팀이 지난 3월12일 고운사에서 열린 축하행사를 마친 뒤 명상을 하는 모습. [중앙포토]

여자 컬링 대표팀이 지난 3월12일 고운사에서 열린 축하행사를 마친 뒤 명상을 하는 모습. [중앙포토]

이번엔 의성 북부의 사촌마을과 고운사를 들렀다. 사촌마을은 외진 산골인 산수유마을과 영 딴판이었다. 너른 평야지대에 기품이 느껴지는 한옥이 모여 있다. 조선 유학자 김광수(1468~1563), 류성룡(1542~1607)이 사촌에서 났다. 마을에는 퇴계 이황(1501~70)의 제자 김사원(1539~1601)이 후진 양성을 위해 지은 만취당이 있다. 한국 최고(最古) 목조주택으로, 보물 1825호다. 사촌가로숲도 근사하다. 약 600년 전인 고려 말에 조성한 숲으로, 우람한 상수리나무·느티나무·팽나무가 빽빽하다.
사촌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고운사가 있다. 조계종 16교구 본사다. 컬링 국가대표 선수들이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 예선에서 탈락한 뒤, 그리고 평창 올림픽이 끝난 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68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뒤, 고운 최치원(587~900)이 가운루·우화루를 증축했다. 그의 호로 절 이름을 지은 이유다. 템플스테이, 사찰음식체험 같은 일반인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은데 봄에는 느긋하게 산책만 해도 좋다. 노루귀 같은 야생화가 지천이다. 가운루 창에 비친 산사의 풍경이 근사하고, 우화루 뒷마당에 앉으면 지붕들 위로 보이는 등운산의 자태가 곱다.

절 곳곳에 목련꽃이 피었다.

우화루 뒷마당에서 본 등운산. 고분처럼 봉긋하다.
의성 고운사에서 산책을 하다가 만난 노루귀.

◇여행정보=3월 31일 시작한 의성 산수유마을 꽃맞이행사가 오는 8일까지 이어진다. 주민들은 이달 중순까지 활짝 핀 산수유꽃을 볼 수 있을 거라 한다. 서울시청에서 산수유마을까지는 290㎞, 자동차로 약 3시간 걸린다. 마을에는 마땅한 숙소가 없다. 하룻밤 묵는다면 의성군청 주변 모텔이나 산운마을·사촌마을에 있는 한옥을 이용하면 된다. 안동 가는 길에 금봉자연휴양림도 있다. 행사장에서 칼국수·비빔밥·파전 등을 팔지만 맛집을 찾는다면 역시 군청이 있는 의성읍으로 가야 한다. 소머리국밥(7000원)을 파는 들밥집(054-834-2557), 돼지 모둠숯불구이(1인분 8000원)가 맛있는 문소식육식당(054-834-2217)을 추천할 만하다. 시장 한편에는 연탄불에 닭발(1만원)을 굽는 식당이 모여 있다.

의성읍 문소식육식당에서 먹은 마을양념모둠숯불구이.

의성읍 문소식육식당에서 먹은 마을양념모둠숯불구이.

의성=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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