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철인황제 아우렐리우스|엄정식 <서강대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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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는 듣던대로 「영원의 도시」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함부로 넘볼수 없는 찬란한 과거가 아직 머물러 있었고 이것이 활기에 찬 현재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미래를 향해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로마에서도 가장 로마적인 상징물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us)황제의 동상을 관람하고 그의 사상과 생애를 회상하기 위해 카피롤리네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에서『철인이 왕이 되든가, 왕이 철인이 되지 않고서는 백성들의 불행이 그칠 날이 없을것이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상국가에서나 기대해 볼수 있는「플라톤」의 「철인왕」개념에 어느 정도 걸맞는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태평성대였던 소위「오현제시대」의 마지막황제였고 이 제국의 통치이념 구실을 했던 후기스토아(Stoa)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이기도 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미11세 때 「알렉산더」대왕과의 담론으로 유명한「디오게네스」의 사상을 통해 스토아철학에 심취해 있었으며 그의 총명하고 성실한 품성이 널리 알려져「하드리아누스」황제의 눈에 띄자 마침내 철인왕으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특히 노예출신의 철학자였던「에픽테투스」의 사상을 몹시 흠모했고 친구이며 스승이기도 했던 「프론토」(M. C. Fronto)의 영향을 받아 스토아학파에 강한 휴머니즘을 도입했다.
이렇게해서 자연과의 합일을 위해 극기만을 강조하던 스토아 철학에 그는 인간적인 상황의 문제를 합류시켰고 실존적인 갈등과 고뇌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아우렐리우스」의 사상을 담고있는 그의 대표작『명상록』12권에 누누이 강조되는 주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곧「인간을 모든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무엇보다도 죽음을 탄생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그대가 그 일부인 이 세계의 참다운 본성을 이해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로 표현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대」라는 말이 오히려「아우렐리우스」자신을 지칭하는 말임에 주의해야 한다. 그는 황제였기 때문에 학파를 형성할 기회가 없었고 제자들을 양성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게르만민족의 침입에 대처하는 진중에서 보냈으며 이 글들은 주로 다뉴브지역의 정벌기간동안에 틈틈이 쓰여진 단편들을 모은 것이다.
그는 로마제국의 운명을 양 어깨에 걸머진 막중한 책임과 고독과 적막감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감에서 헤어나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모든것은 자연의 섭리에 달려있고 죽음은 탄생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절규할수밖에 없었으리라.
황제 「아우렐리우스」는재위 19년만인 서기180년에 원정길에서 탈진한 상태로 로마에 귀환하자 곧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제국은 이때를 계기로해서 분열과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아테네에서 싹튼 이성 중심의 철학이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온 의지 중심적 사상에 의해 압도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뜻으로 마지막 고전인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로마인다운 최후의 로마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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