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과 자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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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흔히『자살만큼 용기 있는 행위는 없다』고들 말한다. 자살할 만한 용기만 가지고 있다면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자살만큼 비겁한 행위도 없다. 자살은 그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의 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살은 가장 용기 있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겁한 행위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저항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다. 자살 그 자체를 저항의 한 방법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도무지 저항해 낼 방도를 찾아낼 수 없게 될 때 자살이라는 궁극적 방법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요즘 한창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고교생들의 잇단 자살을 예로 둘게 되면 문제는 좀 달라진다. 거기에「저항」의 흔적이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학문제와 관련한 학업성적의 저조에 한결같은 원인이 있다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두드러 진다.
자살을 용기나 저항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만한 용기나 저항력을 가지고 학업성적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카뮈」의 소설을 읽고 삶에 회의를 느껴 자살한 여고생의 경우라든지, 집에서 기르던 사랑하는 개가 죽자 따라 죽은 중학생의 경우엔 차라리 낭만이 있다. 『성적이 떨어져서』혹은『진학할 자신이 없어서』자살이란 극한적인 도피처를 찾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 시대, 이 사회의 각박한 단면을 반영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의 자살은 그러므로「타살」의 혐의가 짙다. 이 시대, 이 사회가 그들로 하여금 그같은「작은 고통」조차 극복하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저항력을 길러 주기 위해서는 학업성적이라든가, 진학 따위의 문제는 우리들 삶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어떤 고교 교사가 수업을 시작하기 전 칠판에다 다음과 같은 시를 적었다고 한다.

<성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마라 탓하지 성적 나쁜 날엔 가만히 누워 견디라 즐거운 날이 찾아오고야 말리니>「푸슈킨」의 시『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번안(?) 한 것이다. 고교생의 교실에 이런 낭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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