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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연령 50세 울산공장, 10년 후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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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호 19면

대기업들이 해외투자에 집중하면서 국내 생산비중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사진 현대자동차]

대기업들이 해외투자에 집중하면서 국내 생산비중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사진 현대자동차]

1992년 2월 25일 미국 상원에서 청문회가 열렸다. 도널드 리글 상원의원이 앨런 그리스펀 연준(Fed) 의장에게 질문했다. “현재 미국 전역에 걸쳐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GM의 공장폐쇄 소식에 이어 일주일 간격으로 보잉과 유나이티드테크놀로지가 대대적 감원을 예고했다. 거의 모든 대기업들이 일자리를 줄이고 있으며, 다수 중소기업 또한 다운사이징을 준비하고 있다. 대책이 있나?” 그 후 12년이 지난 2004년 3월에도 상원은 ‘미국 산업의 상태(state of U.S. industry)’라는 이름으로 유사한 청문회를 열었다. 쟁점은 역시 자본이동과 일자리 감소 문제였다.

2006년 이후 해외 순투자 178조 #그만큼 양질의 일자리 외국으로 #더 많은 임금보다 일자리가 중요 #‘고용 창출 세액 공제’ 고민해 볼만

 1950년대 세계 산업생산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던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비중은 1980년대부터 급감하기 시작, 60여년이 지난 2015년에는 16%까지 줄었다. IBM, 월플, GE 등 미국의 대표선수들은 더 이상 ‘미국산(Made in USA)’ 제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1980~90년대의 해외투자와 공장이전이 주로 제조업에 집중되었던 반면, 2000년대에 들어서는 서비스 및 첨단기술 분야까지 확대되었다. 결국 미국 노동자들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일자리 회복을 외친 도널드 트럼프를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일자리 창출의 구호아래 평등과 포용, 평화와 균형의 가치는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위기의식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 사정도 다를 바 없다. 최근 우리 노동시장의 관심은 한국GM의 군산공장 폐쇄에 집중되어 있다. 매년 기술개발비와 이자비용, 그리고 수백억원의 업무지원비를 빼가면서도 투자에 인색했던 GM을 비판하는 여론이 비등한 한편, 적자를 무시한 노동조합의 임금요구와 고비용 노사관계를 성토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원인이 무엇이든 1980년대부터 ‘도주’ 전략을 학습해 온 GM을 잡아둘 방법은 마땅치 않다. 자국 내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싸들고 나온 기업에게 우리나라의 고용문제에 대한 고려를 요구하는 일도 넌센스다. 결국 짐 싸서 떠나는 건 불문가지(不問可知)다.

 GM 문제를 차치하고도 우리나라 대기업의 해외투자 비중은 세계 일류급이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그리고 LG전자 등은 지난 10년간 꾸준히 해외로 생산기지를 확대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해외 생산 비중은 80%를 넘었고, 현대자동차의 현지공장 생산 비중도 60%를 넘었다. 삼성전자는 베트남 호치민 인근에 가전공장을, 하노이 인근에 11만명 규모의 휴대폰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동반 진출한 협력업체를 포함하면 15만명이 넘는 규모다. 현대자동차는 중국 6개, 인도 2개, 그리고 미국, 체코, 터키, 러시아, 브라질 등에 각 한개씩 생산 공장을 가동 중이다. LG전자 또한 미국,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및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공장을 운용하고 있다. 포스코, 한국타이어, 두산중공업 등 유력 대기업들 모두 해외에 생산기지를 확장하고 있다.

 한국수출입은행 발표에 따르면 2016년 우리나라 해외직접투자액은 약 492억 달러에 달한다. 국내로 유입되는 직접투자는 감소되는 추세인데 해외로 나가는 투자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다. 2006년 이후 10여 년간 직접투자 유입액이 유출액을 초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결과 누적유출액 규모는 약 178조원에 달한다. 해외투자 기업의 대부분이 글로벌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이고 모두 양질의 일자리를 공급하는 주역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자본유출은 곧 일자리의 이탈에 다름 아니다.

 생산자본이 움직이는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원가절감이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이 비용절감형 자본 유입의 대표지역이다. 베트남 근로자들의 인건비는 원화 기준 월평균 40만원 수준이며, 4지구로 나눠 구분 적용되는 최저임금은 한국기업 다수 소재 지역의 경우 월 17만원 수준이다. 노동력 비용 뿐 아니라 토지 및 설비비 또한 자본 유출국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다.

 시장 접근성 확대와 무역규제 회피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미국, EU, 남미 및 중국 등으로의 자본 이동은 제조 목적이라기보다 판매를 고려한 것이다. 관세를 피할 수 있고, 물류비를 절감할 수 있으며, 각종 제도 적응의 비용이 저렴해 가격 효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다음은 제도적 유인이다. 노동시장 규제가 약하고 인사관리 관행이 유연한 경우 자본 유입을 기대할 수 있다. 스페인, 이탈리아 및 프랑스 등이 규제 완화를 통해 투자유치를 시도해 온 대표 사례다. 하지만 변화 과정에서 전환비용이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사회적 갈등이 초래되는 경우 기업 이탈을 초래할 수 있다.

 마지막 요소는 강력한 정부 지원이다. 해외 자본유치를 위해 법인세를 깎아주거나, 토지와 인프라 등을 헐값에 제공하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직접 재정을 보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 정부는 철수를 선언한 BMW 미니와 이면협약을 통해 말 못할 수준의 지원을 약속하고 공장을 존치시켰다.

 내수시장이 크지 않은데다 인건비 등의 생산단가가 이미 높은 수준에 올라있는 사정을 고려할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제도개혁과 정부지원 뿐이다. 무엇보다 노동시장을 둘러싼 제도의 혁신적 개선이 필수적이다. 핵심은 불안정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노동시장 제도간 마찰을 제거하고 시장 관행과 사법적 판단 사이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 노동시장의 상하 통합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대기업 부분의 시장 규율을 완화하고 중소기업 부문의 보호를 강화하는 더블트랙 전략이 필요하다.

 투자유치를 위한 정부의 노력도 긴요하다. 정부의 역할은 제도와 투자환경을 정비하는데 집중되어야 한다. 신규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에게 고용창출 성과에 비례해 법인세를 감면해 주는 ‘일자리 세액 공제’ 제도의 도입을 고려해 봐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해 지역별 산업클러스터를 육성하고 생산 지원을 확대하는 일 또한 필요하다. 클러스터별 특성을 반영해 임금과 일자리를 교환하는 다양한 ‘광주형 일자리 모델’도 고민해 볼 만하다.

 노동조합의 활동 목표 또한 일자리를 중심으로 전환돼야 한다. 울산 현대자동차의 경쟁상대는 더 이상 폭스바겐이나 도요타가 아니다. 그들을 위협하는 대상은 북경현대자동차이며 나아가 인도와 미국의 공장들이다. 평균연령 50세, 평균연차 20년의 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난 10년 후에도 울산현대가 모(母)공장 지위를 유지하려면 노동조합 운동의 전략적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보다 ‘더 많은 임금’보다 ‘일자리’가 중요하지 않은가?

권순원
숙명여자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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