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최초의 상황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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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학가 운동권의 투쟁 구호가 반미·통일론으로 모아지고 있다. 그와같은 구호는 운동권이 이 문제를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삼고 이른바 「제도권」을 통 일 논의의 국외자로 보는 투쟁 방식만 아니라면 민주화 시대에 당연히 제기되어 마땅한 쟁점이다.
이 문제는 뿌리가 깊고 이에 연유된 사안들이 복잡한 만큼 좌우어느 한쪽의 가치관이나 특정 집단이 독점하려 들때 독선에 빠지게되고 궁극적으로는 통 일 이라는 민족적 대의를 실현함에 있어서 실효성을 해칠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겪어온 바가 말해 주듯이 민족내부의 갈등해소와 함께 분단의 원인이었던 주변 강대국간의 갈등해소가 일치될때만 원만하게 이루어질수 있는 숙명적 조건에 얽매여 있다.
민족 내부의 갈등은 지난 10여년간 거듭해서 우리가 겪어온 북한의 테러공작과 올림픽 개최문제를 놓고 계속되고 있는 불화가 보여주듯 한치의 개선도 이루어지고 있지않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의 외부 조건을 이루고 있는 강대국간에는 놀랄만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미소간에 핵무기감축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면서 그들 사이의 관계를 불편하게 했던 이른바 지역문제들이 급속도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미·소·중공간에 최대의 쟁점이 되어온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대는 지난 16일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뒤이어 앙골라에서도 소련과 쿠바 군사 고문단을 철수시키기 위한 협상이 5월초 런던에서 시작되었고, 지난 17일에는 리스본에서 다시 실무협상이 있었다.
또 미· 소· 중공간에 주요 쟁점이었던 베트남군의 캄푸치아 주둔문제도 베트남측이 연내에 5만명의 군대를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함으로써 분쟁 해결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와같은 강대국간의 지역분쟁해결 조짐은 모든 당사국들이 직면하고 있는 자국 경제문제의 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에서 나오고 있는것이기 때문에 전세계에 걸친 군사개입의 축소현상으로 해석될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먼 나라에서의 지역분쟁 해결이 한반도에까지 어떤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판단도 할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런 조짐은 미 국방성 고위관리의 미군 철수 가능성과 한미연합사의 지휘권 이양 발언에서 미약하나마 나오고 있다. 또 소련쪽에서도 태평양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강조한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블라디보스토크 연설에 이어 한국과의 관계개선 접근 움직임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중공의 경우는 벌써 수년전부터 북한의 모험주의를 만류하는 중재자 역할을 은밀히 수행하고 있다. 이와같은 주변 강대국들사이의 움직임에서 우리가 유추할수 있는 한가지 확실한 결론은 이들중 어느쪽도 한반도에 분쟁이 재발하는 것을 원치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한반도 문제를 남북한이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풀어나갈수 있는 외적조건이 전후 처음으로 성숙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좌든 우든 어느 한쪽의 독선이나 지나치게 단순화된 문제의식으로 민족의 대사를 조급하게 서두르다가 그르쳐선 안된다는 우려를 제시하는것도 이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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