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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허준’ 떴다, 시골 할머니들 줄을 서시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허준이 따로 있나. 저기 있는 젊은 의사 선생님이 허준이지. 침 한 번 맞고 나면 싹 나은 거 같여~.”

천안 동남구 공보의 이경구 한의사 #주 2회 의료시설 부족한 지역 왕진 #돌아가신 조모 생각에 힘든 줄 몰라

지난달 23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마을회관. 이 마을에 사는 할머니 13명이 진료를 받기 위해 거실에 앉아 있었다. 이날은 매달 3~4차례씩 이뤄지는 천안 동남구보건소의 왕진이 예정된 날이다. 한의사가 찾아온다는 소식에 할머니들은 이른 아침부터 회관에 나와 진료 순번까지 정했다.

할머니들은 공중보건의 한의사 이경구(30)씨가 오는 날을 며칠 전부터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이씨는 할머니·할아버지 사이에서 ‘천안 허준’으로 통한다. ‘침 한 번만 맞으면 낫는다’는 환자들의 평가에다 친절하다는 소문까지 더해지면서다.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마을회관에서 할머니에게 침을 놓고 있는 한의사 이경구씨. [신진호 기자]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마을회관에서 할머니에게 침을 놓고 있는 한의사 이경구씨. [신진호 기자]

마을회관을 찾은 이씨는 보건소 직원들과 함께 순번을 확인하고 문진표를 작성했다. 첫 번째 환자 최계순(84) 할머니는 허리통증을 호소했다. 오랜 농사일로 반복되는 허리통증 때문에 그동안 양방·한방 진료를 받았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얼마 전 “보건소에 있는 용한 한의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열일을 제치고 마을회관으로 왔다. 이씨는 손으로 최 할머니의 허리를 주무르고 여기저기 살핀 뒤 침을 놨다.

다음 환자인 전순례(78) 할머니는 “어깨가 안 아픈 데가 없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양어깨를 꼼꼼하게 만진 이씨는 능숙하게 침을 놨다. 15분쯤 지난 뒤 침을 빼자 전 할머니는 “아이고 이렇게 시원하댜. 금방 다 나은 거 같어”라고 환하게 웃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할머니가 “우리 집 아저씨 술·담배 못하게 하는 침도 있슈?”라고 묻자 이씨는 “침이 효과가 있지만 본인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어 “아저씨를 한 번 제게 보내세요”라고 말했다. 팔십 평생 한 번도 침을 맞지 않았다는 할머니는 “침이 무서워서 한의원은 근처도 못 갔는데 오늘은 (소문을 듣고)큰 맘 먹고 왔다”고 했다.

이씨는 13명의 할머니를 모두 진료하는 동안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할머니처럼 생각해서다. 2016년 4월 공중보건의를 시작한 이씨는 입대 전 조모상을 당했다.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기 전 군 생활을 시작해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두고두고 남았다. 이 때문에 다른 환자들보다 할머니들을 대할 때 더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지난해 4월부터 천안 동남구보건소에서 근무하는 이씨는 매일 40~50명의 환자를 진료한다. 다른 진료과목보다 10여 명 이상 많은 숫자다. 용하고 친절하다는 소문 때문에 천안 곳곳에서 그를 찾아오는 환자가 계속 늘고 있다. 그는 매주 수·금요일 의료시설이 부족한 시골 마을을 찾아다니며 환자를 진료한다.

이씨는 천안시 풍세·광덕면을 맡고 있는 동네 주치의다. 하지만 병천면을 비롯해 여기저기에서 “이경구 선생님을 한 번 보내달라”는 요청이 이어지면서 이날 탑원리 마을회관을 찾은 것이다.

그는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광덕면의 한 부부 사연을 꼽았다. 중풍으로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아저씨를 대신해 아내가 통역을 해주면서 진료를 받았다. 처음엔 아프다는 표현도 못 하던 아저씨가 여러 차례 침을 맞고 진료를 받은 이후 대화를 나눌 정도로 차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씨는 “군 복무를 대신해 공중보건의로 근무하고 있지만 아들·손주처럼 반겨주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힘든 줄 모르겠다”며 “집은 서울이지만 천안이 제2의 고향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천안=신진호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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